정치권의 「김일성 면담병」/김진국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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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기택 민주당 대표가 연두기자회견에서 북한의 김일성주석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대표는 김 주석을 만나고 싶어하며,추진해온게 사실이라고 한다.
이 대표 측근들은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겠다는 순수한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핵문제로 미묘한 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이었을까. 핵문제라면 우리 정부도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국제문제가 돼버렸다. 그의 주장처럼 자주성을 외쳐서 방향을 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대표가 경협을 약속해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경협을 핵에 묶어놓은 것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이다. 현 여건에서 그가 김일성을 만나서 고작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결국은 한국당국과 대화하라는 말 뿐이다. 그가 남북문제를 다루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우선 남북 사이를 얼어붙게 한 핵문제에 대한 인식도 분명치 않다. 김대중씨가 주장하는대로 핵문제와 경협문제를 묶어서 「일괄타결」하는 방식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핵문제와 경협문제는 분리해서 병행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혼돈만 있을 뿐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만 협상이 진행되고 한국이 배제된데는 북한의 책임이 더 크지 않으냐는 질문에는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주변여건을 둘러보거나 이 대표의 정리되지 못한 대북관을 볼때 그의 김일성 면담론은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후보들이 그러했듯 이 대표도 김일성 면담을 자신의 위상을 올리는 계기로 삼으려는 계산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대표라고 김일성주석을 못 만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과거 4당체제에서 노태우·김대중·김영삼씨 등 3당 대표들이 일제히 김일성을 만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지금 핵문제가 꼬인데는 노 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에 욕심을 낸 것도 큰 요인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종이조각에 불과한 남북합의서를 서둘렀던 것도 노 전 대통령의 김일성 면담병 때문이었다고 비판하는 소리도 있다.
이 대표가 중국을 통해 북한에 접근한다는 것도 김영삼대통령이 야당총재 시절이던 89년 6월 모스크바에서 허담 조평통 위원장(사망)을 만난 것을 흉내내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왜 한국 정치인들은 이런 발상을 할까. 김일성이 한국정치인들의 이러한 병을 보면서 얼마나 기고만장할 것인가라는 생각은 못하는가. 또 김일성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 경우 그 폐해가 얼마나 크겠는가. 대권으로 가는 길은 평양을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을 국민이 어떻게 생각할지 성찰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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