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엔 건의말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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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잘보이려고 애쓰는 것은 나무랄 일이 못된다. 예의와 정성을 다해 윗사람을 모시는 것은 아랫사람의 도리다. 그러나 민도가 높아지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모시는 방법도 세련되고 합리적으로 바뀌어 가게 마련이다. 너무 노골적인 아첨이나 간지럽게 느껴지는 대접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쉽다. 60년대만 해도 대통령의 행차를 맞은 지방관청이 멀쩡한 나무를 베어다 없는 가로수를 급조했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 혼쭐난 사례가 있었지만 이런 얘기는 이제 아득한 전설같은 얘기다.
그러나 60년대도 아닌 90년대에,그것도 개혁과 국제화를 소리높여 외치는 이 시절에 듣는 귀를 의심케 할 「옛날식」이 나타났다는 소식이다.
지난 3일 전남지사는 5일로 예정된 최형우 내무장관의 방문에 앞서 전남 해남군의 여객기 추락지였던 마천마을을 미리 찾아가 주민들에게 사전 「입단속」을 시켰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행정기관이 알아서 처리할테니 최 장관에게 이것저것 어려운 문제를 건의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
지사로서는 장관이 오면 주민의사를 솔직히 전달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상식일텐데 전남지사는 장관의 심기를 편하게 하자는데만 더 신경을 썼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가하면 내무부는 최 장관의 이 행차에 도지사도 얼굴을 내밀지 말라고 지시했다가 뒤늦게 TV에 보도되게 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도관계자들이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도 있다.
지사의 사전 「입단속」이나,내무부의 갑작스런 홍보지시나 모두 어쩐지 듣기가 거북하고 『…우째 이런 일이…』라는 기분이 안들 수 없다. 더욱이 주인공인 최 내무가 「실세」라는 말을 듣는만큼 아래랫사람들이 모시는데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은 없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좀 막연한 얘기지만 공직자가 마음에 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국민이라야 할 것이다. 공직자가 국민이 아니라 상사나 임명권자를 기준으로 삼으면 자칫 모시는 방법이 상궤를 벗어나기 쉽고 국민으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받을 우려가 있다. 국민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입단속」이나 TV보도가 뭐 그리 중요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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