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도 못벗은 「엄포행정」/정순균 사회1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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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가뜩이나 「실세」장관이 부임했다 해서 국민들로부터 주시의 대상이 되고있는 내무부가 심야·퇴폐업소 근절을 위해 이들 업소 단골손님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세무조사까지 하겠다고 벼르고 나서 국민들을 어리둥절케 하고 있다. 90년이후부터 불법업소들에 대해 단속을 펼쳐왔으나 뿌리가 뽑히지 않으니 이젠 업주는 물론 손님들에게까지 불이익을 줘 어떻게든 근절시키고야 말겠다는 것이 내무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지난 세월 탈세자·자녀 병역기피자·자녀 대학부정입학자 등 온갖 명단공개를 봐온 국민들로서는 앞으로 술집 단골명단까지 볼 수 있게 된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지금도 이런 풍습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릴적 동네꼬마녀석이 밤새 이불이나 요위에 「실례」라도 한 다음날이면 어머니들은 어김없이 키를 꼬마녀석의 머리위에 씌우고 바가지를 들려 이웃집에 소금을 얻으려 보낸 기억이 난다. 「실례」했다는 사실을 이웃들에 공개,어린 마음에 창피를 줌으로써 버릇을 고치겠다는 뜻이 담긴 풍습이었다. 내무부의 발상도 이런 차원에서 출발한 것으로 짐작된다. 불법유흥업소 단골손님들의 명단을 밝혀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업소로 향하는 발길을 차단해야겠다는 의도인 듯 싶다. 이 방침이 그대로 실시될지,또 얼마나 그 실효를 거둘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무부가 몇가지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단골손임의 범주가 어디까지냐도 시빗거리지만 술집손님을 죄인시하고 있는 잘못된 시각이다. 또 이 세상에 정부가 술집손님 명단을 공개하는 나라가 과연 몇나라나 될까. 더구나 육법전서 어느 구석에도 술집손님 명단을 공개하고 세무조사를 하라는 구절은 보지 못했다.
법적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내무부 간부나 실무담당자 모두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이 방침이 그대로 실시된다면 이는 분명 법적근거 없는 불법이요,관의 횡포임에 틀림없다.
알려진 바로는 신임 최형우장관이 심야·퇴폐업소 강력단속을 지시하자 밑의 실무자들이 「실제」장관의 힘을 믿어서인지 앞뒤 한번 따져보지도 않고 손쉽게 불쑥 내놓은 대책이 겨우 손님명단 공개요,세무조사였다.
『창피를 무릅쓰고 어디 한번 가볼테면 가보라』는 식의 대국민 경고요,엄포인 셈이다. 군사독재시절에서도 감사야 할 이같은 「엄포행정」이 오늘의 문민정부 아래서 먹혀들리라 생각했다면 이만저만한 오산이 아니다. 「실세」장관이 부임직후부터 외쳐온 「봉사행정」과 이번의 「엄포행정」은 아무래도 앞뒤가 안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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