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옥살이1년>1.육감으로 짜맞추기 언제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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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경찰관에게 살인범 누명을 씌워 1년이 넘도록 옥살이를 시키다진범이 잡혀 풀어준 金基雄순경사건은 우리나라의 수사.재판과정이얼마나 허술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대법원은 법률심이기 때문에 진범이 검거되지 않았더라면 金순경사건이 대법원에서 바로잡혀지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이 사건의 초동수사에서 항소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 어느 부분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살펴본다.
92년11월29일 오전3시30분쯤 金순경과 함께 서울관악구신림동 청수장여관 203호실에 투숙했던 李모양(당시 18세)이 30일 오전10시15분쯤 목이 졸려 숨진채 발견됐다.
발견.신고자는 金순경.
金순경은 『자살한 것 같다』고 112에 신고했다.경찰이 출동하자 金순경은 오전7시쯤 혼자 여관을 나와 파출소에 출근했다 다시 가보니 李양이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을 감식한 관악경찰서 형사팀은 우선 金순경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함께 투숙했던데다 李양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고 사체의 발견자였다.
결혼 말이 나올 정도였으나 집안의 반대로 다투고 헤어진 사이였다. 누가 봐도 목졸린 흔적이 뚜렷한데도 「자살」같다고 신고한 것도 의심거리였다.당황한 표정으로『소파 위에 있었던 李양의핸드백이 없어졌다』는등 횡설수설까지 해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정황으로는 金순경이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차린 형사들은 현장에서 연행한 金순경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이때 벌써 경찰은 金순경을 용의자가 아닌 범인으로 단정하고있었다.형사들은 金순경에게『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당신짓으로 결론이 났다』며 자백을 강요했다.
사건 당일 밤을 새고 다음날인 30일오후까지 세차례나 진술조서를 작성했지만 金순경은 완강히 범행을 부인했다.그러나 1일 새벽 4차조서에서 金순경은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李양이 『마음이 변했다』고 앙탈을 부려 주먹으로 때 리고 손으로목을 누르자 질식해 인공호흡을 시도했으나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과정에 가혹행위가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金순경은 검찰과 법원 신문에서 당시 잠을 안재워 너무 지친데다 동료 경찰의 꾐에 빠져 형사가 부르는대로 허위자백했다고 진술했다.형사들은 싸우다 실수로 죽였다고 범행을 시인하면 살인 죄가 아닌 폭행치사죄를 적용해 주고 동료 경찰들이 석방을 탄원토록 해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해준다고까지 했다는 것.이에따라 경찰은 李양이 숨진뒤 金순경이 인공호흡을 한것으로 꾸몄고 실제로 폭행치사죄를 적용,검찰에 송치했다.) 金순경이 범행을 시인한 뒤 경찰은 2일 金순경의 신병을 서울경찰청으로 넘겼다.소속 경찰서에서자신들의 직원을 수사하는 게 좋지않다는 이유였다.그러나 서울경찰청 강력계도 사흘간 5차례나 조서를 받았지만 범행 내용을 보강하는데 그쳤을 뿐이었다.
金순경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은 4일 자정쯤.경찰에 연행된뒤 5일(1백33시간)만이었다.형사소송법상의 48시간 구금규정을 엄청나게 초과했지만「범인」으로 구속된 이상 아무도 이를 인권침해라고 문제삼는 사람은 없었다.구속 당시 적용 된 죄명은 폭행치사.金순경이 구속수감된 뒤에는 경찰서나 경찰청 모두 더이상 수사를 한 기록이 없다.
결국 1차수사를 맡았던 경찰은 수사를 한 게 아니라 육감에 의해 「짜맞추기」만 한 셈이다.즉 「범인은 金순경」이란 답안을미리 만들어 놓고 이를 뒷받침할 그럴듯한 증거만 수집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李양이 숨진 시간이나 현장감식.유류품 확인등 초동수사는 자연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感」만으로 너무 쉽게 빨리 범인을 확신.단정하는 바람에 다른 가능성은 모두 배제하는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 경찰에 만연되어 있는 육감수사가 얼마나위험한가를 뼈저리게 가르치며 과학수사의 필요성을 교훈으로 남기게 됐다.
〈崔相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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