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는 모두 주관식(선진교육개혁:2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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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객관식 시험도 있나요”/“왜 법에 따라야 하나”식으로 출제/불,수업시간 답변이 곧 성적/한국선 국교시험 줄인다고 항의
교육(teaching)과 성적평가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아무리 교육이 올바르더라도 평가가 잘못된다면 결국 실패한 교육이다.
주입·암기식으로 일그러진 한국교육이라는 동전은 객관식 맹신주의라는 뒷면 때문에 더욱 흉한 몰골을 하고 있다. 국민학교에서 대학입시까지 우리의 성적평가에는 「객관식 망령」이 덮어 씌워져 왔다.
프랑스 파리 프랑부르좌 중학교 2학년 폴군(13)은 최근 연극배우가 돼야 했다. 평소 국어(불어)시험은 전부 주관식 논술문제지만 이번은 몰리에르의 짧은 희곡 한편을 전부 외어 교단에서 직접 연기하는 시험을 치렀기 때문이다.
연극은 바로 내신성적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폴군은 거울을 봐가며 열심히 연습해야 했다.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참 힘들었어요. 하지만 치르고보니 남들 앞에 서는데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폴군이 그보다 2주전에 치근 시험은 교사가 내준 10개의 단어를 보고 그 단어들이 들어간 서로 다른 주제의 글짓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아도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자기 생각을 말과 글로 올바르게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우리 교육과 평가의 목표입니다.』 13세짜리 아이들에겐 너무 벅찬 시험이 아니냐는 취재팀의 지적에 대한 교사의 대답이다.
프랑스 아이들은 국민학교 때부터 구술시험을 치른다. 주어진 질문을 얼마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말로 표현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파리 서쪽 볼로뉴 국교 구요네트 교장은 한국의 객관식 시험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근심스레 말했다. 『네 다섯가지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에만 익숙해진다면 종합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국어·역사·사회 등의 과목은 수학과 달라 주어진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닌데….』
프랑스엔 우리의 수학능력시험격인 바칼로레아라는 대입자격시험이 있다. 전국 인문계 고교생들이 모두 치르는 대규모 시험이지만 객관식 문제라곤 전혀 없다. 객관식으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에겐 없기 때문이다. 「베를렌의 시 장례식을 비평하고 그가 장례식을 조롱하기 위해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를 밝혀라」 「도덕적 양심은 단지 교육의 결과인가」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는가」 「국가란 자유의 적인가」 「왜 법에 복종해야 하나」….
박사학위 논문 제목 같지만 프랑스의 17세짜리 인문계 고3생들 모두가 치르는 바칼로레아의 시험문제들이다.
독일 중·고교는 논술 60%,교사의 관찰과 구술시험 40%로 내신성적을 평가한다. 하지만 객관식시험이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대학입시는 전국적으로 치르는 아비투어 성적이 40%고 나머지는 내신성적이 반영된다. 따라서 수업시간에 교사의 질문에 얼마나 답변을 잘하는지가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참고서 필요없어
교사가 혹시라도 주관을 잘못 개입시키면 우선 학생들에 의해 견뎌낼 수 없게 돼있다. 어려서부터 정확한 의사표현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은 교사의 잘못을 서슴없이 지적한다.
독일 뮌헨시 루이젠 김나지움을 졸업한 유진양(19·아우스부르크법대 1년)의 경험담.
『고2 수업시간 때 역사선생님이 특정학생만 답변을 시키며 계속 편애했어요. 결국 반학생들이 연명해 교장선생님께 정식 항의를 했죠. 조사결과 저희들의 주장이 사실임이 드러나 교사는 징계를 당했고요.』
기자는 영국의 중·고등학교앞 서점을 들러봤다. 으레 문제풀이집·참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단 한권도 없었다. 『어차피 시험이 전부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논술하는 것인데 참고서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차라리 책이나 논문을 한권 더 읽는게 낫지….』
런던 근교 피너의 나우어 힐 스쿨 인근 서점주인이 참고서라고 내놓은 과학책은 실험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과 좀더 공부하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내용 등이 적힌 말 그대로 「참고(reference)서」였다.
중·고교때 기계처럼 문제만 풀어대던 우리 학생들의 한계는 대학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리 유학생들은 머리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기 생각을 정리해 표현하고 토론하는데 약해요. 어릴 때부터 붕어빵 찍어내듯 지식을 주입받고 달달 외어 문제만 풀어댄 결과죠.』
하버드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인 염형곤씨(29·서울대 외교학과졸)는 『소말리아 미군파병,낙태 합법화,동성연애자 금지 등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 짧은 시간안에 일목요연하게 리포트를 척척 써내는 미국 대학생들을 볼 때마다 한국 유학생들은 객관식 위주 교육의 한계를 절감하곤 한다』고 말했다.
「뭘 많이 아는데 딱 떨어지는 자기 주장을 제대로 못한다」 「표현력이 부족하다」 「논리력이 달린다」. 미국 유럽의 명문대에서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의 한결같은 고백이다.
○즉석서 논문 척척
한국교육이 잘못인줄 알면서도 죽어라 객관식에 매달리는 것은 교육제도와 환경의 탓이 가장 클 것이다.
국교의 경우 한반에 40명이 넘는 아이들을 교사 한사람이 주관식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중·고교로 가면 과목담당 교사가 맡는 학생들의 수는 몇백명을 넘어간다. 국민학교 30명중,중·고교 20명선인 선진국들과는 어차피 비교가 안된다.
여건탓만 할 것도 못된다. 더 중요한 의식이 잘못돼 있기 때문이다.
서울교육청은 올부터 국민학교 1∼2학년은 아예 시험을 없앴고 3∼6학년은 1년에 두번만 시험을 치르도록 결정한뒤 수많은 항의전화를 받았다.
「왜 우리 아이의 성적을 정확히 알 수 없게 하는거냐』는 내용이었다.
열악한 교육환경,학부모들의 잘못된 교육열,교사들의 미흡한 자질,현실유지에 급급한 교육행정…. 수십년간 우리 교육이 객관식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데는 이처럼 복잡한 원인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
○선발방식 바꿔야
최근 기업들이 선진국처럼 적성검사와 고교 생활기록부·대학성적·논술시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신입사원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은 뒤늦게나마 다행이다. 객관식 성적이 우수한 것이 실무능력과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고교의 수업내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대학의 줄세우기식 선발방식이 달라지지 않는한 거꾸로 가는 우리 교육이 제대로 설 수 없다.
우루과이라운드가 단적으로 말해주듯 개방화·국제화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다. 우물안 개구리식에서 벗어나 세계와 맞설 수 있는 창의력있는 인재들을 길러내기 위해선 객관식의 오랜 망령을 떨처내는 것이 우리 교육의 시급한 과제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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