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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자유화 실명제시대/은행지점장/실적채우기·직원교육 “분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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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쓰러지는 중기 많아 대출땐 겁부터/「행원의 꽃」 옛말… 전투 소대장 노릇
실명제와 2단계 금리자유화 시행이후 은행 지점장의 하루는 더욱 바빠졌다. 이제 자기 이름으로 예금해야 하기 때문에 큰손의 예금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오거나 앉아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던 시대는 지났다. 지점장은 본점의 탄약지원(새상품)을 받아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전투부대의 소대장격으로 변했다.
『실명제 이전 7억원을 예금했던 고객이 단 한푼 남기지 않고 빼내갔어요. 금융자산에 대한 종합과세는 96년 소득분부터 실시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서울 동대문시장 주변에 있는 A은행의 지점장의 이야기다.
하루종일 섭외하러 나갔다 온뒤 이렇게 거액예금이 그것도 1만원짜리 뭉칫돈이 빠져 나가면 허탈해진다. 상인들이 세금 내는 정도에 맞춰 일정선까지만 예금하고 그 이상은 현찰로 보유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화폐교환(1만원짜리)설이 한참 나돌 무렵 1천만원을 모두 5천원짜리로 만들어달라는 고객도 있었다 한다. 지점 금고속의 돈만으로 부족하면 본점이나 가까운 다른 지점에 가현금을 빌린다.
그런가하면 은행마다 새상품을 봇물처럼 쏟아내자 직원 교육은 물론 할당된 실적을 채우느라 더욱 바빠졌다.
『그전엔 지점장이면 괜찮았지요. 그런데 요즘 보통 머리가 아픈게 아닙니다. 몇몇이 모이면 차라리 본점의 한가로운 부장자리가 좋다는 푸념도 합니다.』 서울 서초동 아파트 단지 주변 B은행 지점장의 말이다.
특히 지점장은 팔방미인이 돼야 한다. 지점장실을 줄여 노래방을 만든 곳도 있다. 때를 맞춰 주부강좌도 열어야 하며 민원해결사 노릇도 해야 한다. 실명제 시행 초기에는 세무상담도 맡아 했다.
이전에는 무조건 예금을 많이 끌어들이기만 하면 인정을 받았지만 상은 명동지점 사건이후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효자노릇을 하던 양도성 예금증서(CD)가 문제가 됐고 예금실적을 올리기 위한 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커미션을 내놓고 챙길 수 없기 때문에 한정된 업무추진비를 알뜰하게 써야 한다. 『씀씀이를 줄여야지요. 거래선을 돌 때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점심시간을 피해 다닐 정도입니다.』 서울 남대문시장 주변 C은행 지점장의 「구두쇠 작전」이다.
한달에 1백50만∼2백50만원정도의 업무추진비로는 경조비와 지점마다 두팀씩 운영하는 골프모임 등 「귀한 손님」 접대 몇번 하기가 쉽지 않다.
『대출해주기가 겁이 날 때도 있어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의 경우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최근 청탁을 받아 대출해주면 처벌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정말 규정을 제대로 지키고 대출심사때 일선 지점장의 의견을 잘 들어줘야지요.』
일행 20∼25년만에 힘겹게 오르는 자리지만 「은행원의 꽃」 「소 은행장」으로 불리기엔 이제 너무 외롭고 고단한 하루의 연속이다.<양재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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