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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상에 선 일본(선진교육개혁/내일을 여는 현지취재: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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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획일 벗고 창의·개성살리기/암기보다 스스로 깨닫게/대학마다 특색있는 전공교육/교양학점 없애고 전문분야 확실히 가르쳐
『일본은 교육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최근 일본교육이 이룩한 성과는 경제발전 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일본교육 현장을 살피고간 미국(87년),영국(91년) 교육학자들의 귀국보고서에 나타난 한결같은 결론이다. 보고서는 일본의 높은 교육열과 충실한 의무교육,교사에 대한 높은 사회적 지위,일본 기업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기술훈련에 대해 「부럽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문부성에서 만난 고마쓰(소송친차랑) 정책조사관의 첫마디는 그같은 결론에 회의적이었다.
그가 제기하는 일본교육의 문제­.
『획일적인 일본 교육이 앞으로 다가오는 슬기의 시대,창조의 시대에도 과연 유용할 것인가. 그동안 일본 교육의 목표는 줄곧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근대화였다. 그 점에서는 이제 더 이상 좇을게 없어졌다. 그러나….』 그의 말은 선진국에 올라선 자부심보다 앞으로의 문제를 상정한 개혁의 절박함을 더 강조하고 있었다.
메이지유신과 패전이후의 교육개편­.
일본의 국가의 본질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어김없이 교육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왔다. 지금 일본이 교육에서 구하는 열쇠는 창의성·개성이다. 바로 이 점이 고마쓰 정책조사관이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일본 교육 방향을 정하는 최고기구인 중앙교육심의회가 91년 문부성에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 교육은 전부가 같은 내용을 배우는 「형식적 평등」에서 벗어나야 한다. 각각의 개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는 「실질적 평등」을 이룩해야 한다.』
이같은 풍향의 변화는 가장 보수적이라는 동경대에서도 확연히 느껴진다.
동경 남쪽의 동경대 선단연구센터는 70년전에 지은 붉은 벽돌의 우중충한 건물. 그러나 외관과 달리 이 센터는 일본에서 첫 손꼽히는 전문가들이 모여 첨단 연구분야를 서로 넘나드는 자유로운 연구로 처음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그들은 학문의 영역을 공유하며 연구하는 것을 「학제성」이라고 불렀다.
인공지능 연구에 경제학자·사회학자가 참가하고,자연과학·사회과학 사이의 벽은 없었다.
또 재직 10년,첨단분야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바닥날 때쯤 교수는 반드시 퇴직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런 파격성은 정년 때까지 배타적인 외길 연구인생을 밟아온 동경대 교수들에게 선단이 아니라 「이단」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87년 새 제도를 도입해 아직 자랑할만한 성과가 나온 것은 없으나 이 연구소는 실망보다 기대속에 움직이고 있다.
통산성(우리의 상공자원부)은 올해 쓰쿠바시에 똑같은 체제의 「융합영역 연구소」를 만들었다. 동경대 사람들도 노벨상의 마지막 희망을 이 연구소에 걸고 있다고 했다.
일본의 고등교육이 지향하는 교육개혁은 소학교·유치원에 이르기까지 물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다.
동경 나카노(중야)역 주변의 곡호소학교는 주택가에 묻힌 아주 평범한 학교. 지난달 28일 방문한 이 학교 2학년 1반은 「생활과(지난해부터 소학교 1,2학년 사회·과학대신 새로 도입된 과목)」 시간에 어른들의 사행성 오락기계인 빠찡꼬를 만들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오카다(강전전자) 담임교사는 『학생들이 빠찡꼬에 호기심을 보이고 만들고 싶어했다. 스스로 배우고 깨닫도록 하는게 생활과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창의성을 높이는 목적이라면 수단에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교사도 수업시간 내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렴』이라는 말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소학교 2학년 답지않게 나무판에 열심히 못을 박으며 수업에 깊이 빠져 들었다.
오카다 선생은 마지막에야 『구슬이 공평하게 흘러가도록 못을 같은 높이,같은 간격으로 박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짜 빠찡꼬를 들어보였다. 빠찡꼬가계를 제작하는 학부형이 만들어준 것이다.
「21세기로의 출범」이라는 이름으로 84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교육개혁은 90년대 들어 탄력을 붙여가고 있다. 각종 학력 측정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기록하는 나라. 좁은 국토,빈약한 자원을 딛고 교육과 인간자본 하나로 경제 최강국으로 올라선 일본.
세계의 꼭대기에 선 일본은 발밑의 번영 대신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었다.
91년에 발표된 대학개혁안에 따라 대학들은 특색있는 전공을 강화하면서 다양성·전문성을 높여가고 있다. 동경대·경도대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대학들은 교양학점을 폐지했다.
대학의 대중화시대(일본은 지난해 대학 진학률이 40%를 넘어섰다)에 일부 엘리트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교양 대신 「평생 먹고 살 전공 하나는 확실히 배우고 나가라」는 것이다.
더욱 뜨거운 열풍은 밑에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유치원교육은 글자·숫자공부 중심에서 「놀이 중심」으로 바뀌었다.
오사카 도심에 위치한 1백5년 역사의 우즈보유치원. 2백평 넓이의 운동장은 원생 99명이 뛰놀기엔 좁아 보였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는한 수업은 운동장에서 대부분 진행된다.
마스다(증전수자) 원장은 『지금까지는 교실에서 어른들이 짜맞춘 틀에 따라 아이들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리는게 교육이었다』고 말했다. 이젠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38년동안 유아교육을 맡아온 그녀는 『경험에 비춰 나는 이번 교육개혁을 메이지유신과 패전에 이은 제3의 일본개혁이라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소학교는 지난해부터,중학교는 올해부터 새로운 교육과정이 전면 실시됐다. 교과서도 개편됐다. 한달에 한번씩 주 5일 수업제가 도입됐다. 8년동안 치밀히 준비해온 개혁의 회오리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이 현재의 비교우위와 안정에 비중을 둔다면 일본의 교육개혁은 끝없는 현상변경을 추구하고 있다. 또 그 속도는 상식을 넘어서고 있다.
크게는 총리 직속의 임시교육심의회가 처음 제시했던 ▲창의력·개성의 신장 ▲국제화 ▲변화에의 대응(정보화 교육·생애교육) 등 세가지 방향으로 착실히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에도 적지않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학벌 위주의 사회와 연 30만명에 이르는 재수생. 동경 요요기(대대목) 주변의 예비교(입시학원)들은 사설 입시강좌를 인공위성을 통해 팔아 거대기업으로 성장할 만큼 사교육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퇴학제도가 없는 일본에서 매년 12만명의 고교생(전체의 2.3%)이 사실상 학업을 중단하고 있다. 연간 50일 이상 결석하는 등교 거부 중학생은 5만5천명.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육현장을 취재해온 아사히신문 야마기시(산안준개) 편집위원은 『이제 30년후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지켜볼 뿐』이라며 개혁은 쉼없이 계속 될 것으로 내다봤다.
호소카와(세천호희) 총리도 취임 후 대외정책과 교육개혁은 정권 교체에도 불변임을 가장 먼저 약속했다. 그는 한술 더 떠 8월에 발표한 6조5천억엔의 경기 부양책에서 1조엔을 대학의 낡은 역구시설교체(이른바 신인프라)에 투입하겠다고 천명했다.
평균 8%씩 증가하던 정부의 대학 연구실험비 지원 예산도 올해는 증가율이 12%로 뛰었다.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국면에 비춰 교육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오사카에서 만난 서강호 삼성물산 지사장의 경험론적 분석은 그런 의미에서 한번 음미해 볼만 하다.
『10년전에는 일본상품 샘플을 뜯어보거나 공장을 한번 방문하면 웬만큼 비슷하게 만들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베낄 수 있던 것들이 모두 컴퓨터 소프트웨어 안에 숨어 버렸다. 곧 소프트웨어의 소프웨어 시대가 온다. 그때는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의 생각까지 읽어야 한다. 모방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의 위기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하고 교육개혁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그 점을 알아야 한다.』
그는 그래서 현지 학교에 다니는 자기 아이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늘어나는 대일무역 적자보다 앞으로 우리가 마주칠 더 큰 위기를 느낀다고 말했다.<이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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