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무궁화 꽃이 졌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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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무궁화는 보기 힘든 꽃이 됐다. 계절 따라 벚꽃 축제, 튤립 축제, 장미 축제, 연꽃 축제, 다 있어도 무궁화 축제는 변변찮다. 나랏일 보는 의원들 번쩍이는 금배지 문양이 무궁화거늘 국회 앞엔 남의 나라꽃 놀이만 있을 뿐이다. ‘나라꽃(國花)’이란 지위가 참으로 무색하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의 가장 오랜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군자의 나라에 (…) 훈화초(薰華草)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 군자의 나라는 우리나라며 훈화초는 무궁화다. 우리 문헌에도 무궁화 얘기가 많다. 신라 때 국서를 보면 스스로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나라’라 일컫고 있다. 신라 때부터 나라꽃이었다는 얘기다. 또 고려 말 문장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꽃 이름을 두고 ‘무궁(無窮)’이냐 ‘무궁(無宮)’이냐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고려 때 이미 무궁화라 불렸음이다. 조선조 문신 유몽인의 시에는 “남자 얼굴이 무궁화처럼 잘생겼다네(善男顔如槿)”라는 구절도 있다. 이 모두 우리 선조가 오랜 세월 무궁화를 즐겨 심고 가꿨음을 의미함이다.

그러니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우국지사들이 무궁화로 민족 정기를 지키려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노랫말을 지어 불렀고, 무궁화 묘목을 나눠 주며 민족혼을 고취했다. 일제는 이를 탄압해 전국의 무궁화를 모두 뽑고 태웠으며 대신 벚나무를 심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순사 몰래 무궁화를 나누고 심었다. 해방 후 그런 무궁화를 제치고 어떤 게 감히 나라꽃이 될 수 있었겠나.

반대가 없진 않았다. 황해도 이북에는 잘 자라지 못한다는 지역적 한계와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논리였다. 그래도 무궁화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대신할 꽃은 없었다. 한국에 오래 살며 우리말과 민속 연구에 공헌한 영국 성공회 리처드 러트 신부는 저서 『한국풍류』에서 이렇게 평했다. “프랑스·영국·중국 등 세계 대부분 나라에서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이 곧 나라꽃이 됐는데 한국만 유일하게 황실의 ‘오얏꽃’이 아니라 백성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졌다.”

그의 말대로 “평민의 꽃이며 민주 전통의 일부”인 무궁화가 이 땅에서 홀대받는 이유는 뭘까. 그건 지리적 이유도 정치적 이유도 아닌 진딧물 탓이 아니었나 싶다. 다른 나무에 비해 유난히 진딧물이 많이 생겨 조경수로 관리하는 데 골칫거리가 되기 때문이란 얘기다. 농업과학기술원 김용헌 박사팀이 최근 그 누명을 벗겼다.

무궁화는 해마다 5월이면 진딧물이 많이 발생해 방제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라는 게 김 박사의 조언이다. 열흘만 놔두면 진딧물의 천적인 무당벌레가 생겨나 진딧물이 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번성한 무당벌레가 인근 농경지로 옮겨가 다른 해충을 잡아먹는 일석이조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다.

그러고 보니 더욱 군자 같다.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할 뿐 아니라 주위까지 맑게 해주는 군자의 도리 말이다. 억울함이 있어도 불평 않는 무던함도 군자를 닮았다. 군자의 나라에 군자는 없더라도 ‘군자목’, 무궁화나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게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