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살자 몸에 남은 지문 '광선사진' 으로 찾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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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I 총회가 열리던 지난달 24일 '사람 피부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법'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실습 결과를 살피고 있다. 이희일 국방조사본부 감식관(左)이 가변광선장치로 팔뚝의 지문 흔적을 찾고 있다. [국방조사본부 제공]

드라마 'CSI'의 그리섬 반장(라스베이거스)과 호레이쇼 반장(마이애미), 맥 반장(뉴욕)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레벨3'라는 것. 레벨3는 국제감식협회(IAI)가 인증하는 범죄 현장 전문가 자격 중 최고 단계다. 현장 경험 6년 이상, 논문이나 저서 발표, 신입 수사관 훈련교관 1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최고 전문가라는 뜻이다.

IAI는 권위와 역사를 자랑하는 단체다. 전 세계 과학수사관들이 가입해 '과학수사계의 유엔'이라고도 불린다. 지난달 22~28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92회 총회가 열렸다. 미국.유럽(영국.프랑스.독일.코소보), 중동(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아(일본.대만.중국), 중남미(멕시코.자메이카) 28개국의 1500명 과학수사관이 참가했다. 150개의 세미나와 99개의 워크숍이 열려 최신 과학수사 기법을 공유했다. 최첨단 과학수사 장비 전시회도 열렸다.

◆'기술'에서 '과학'으로=이번 총회의 주제는 '법과학'이었다. 최근 과학수사에 의학.치과학.곤충학.인류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이 동원되고 있는 추세다. '감식'이란 용어도 '법과학'으로 바뀌고 있다.

올해 총회에선 사람 피부나 종이 등 지금까지 채취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곳에서 지문을 찾아내는 각종 방법이 논의됐다. 성폭행 피해자의 살갗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데 성공한 사례가 발표됐다. 적절한 조건이라면 사망 후 12시간 안에 피부에서 지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비 전시회는 첨단 전자제품 전시회를 연상케 했다. 사건 현장의 입체사진을 찍는 장비가 가장 주목을 받았다. 설치한 위치에서 회전하며 수직으로 180도, 수평으로 360도의 광경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는다. 설치하는 데 5분, 사진 한 장을 찍는 데 7분 정도 걸린다. 위성위치학인시스템(GPS) 수신기가 장착돼 지도에서 현장의 위치를 보여 줄 수 있다.

포토샵으로 유명한 어도비(Adobe)사는 모자를 눌러쓴 용의자의 CCTV 화면에서 그늘진 부분을 처리해 용의자의 눈 주위를 보여 주는 방법을 시연했다. 또 두 개가 겹친 지문을 분리해 내는 컴퓨터 시스템과 사건 현장 상공에서 전체적 모습을 보여 주는 미니 헬기도 선보였다.

◆'CSI 효과'에 고민=IAI 총회에서 드라마 'CSI'는 화제였다. 2000년 드라마 'CSI'가 미국에서 첫 방영된 뒤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방영 중이다. 그러나 전 세계 과학수사관들은 정작 드라마 'CSI'가 탐탁지 않다. 과학수사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 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과학수사관이 즉석에서 손쉽게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 걸프코스트대 데이비드 라운즈베리(범죄수사학) 교수는 "실제 과학수사에선 드라마에서처럼 '일치(match)'란 단어를 안 쓴다. 오차를 감안해 '후보(candidate)'나 '유사(similar)'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범죄자들이 드라마에서 과학수사 기법을 배울까 하는 우려도 있다. 지난해 오하이오주에선 드라마 CSI의 팬이 가족을 살해한 뒤 현장을 깨끗이 치우고 흉기를 내다 버려 경찰의 수사를 어렵게 했다. 반대로 CSI가 범죄자들에게 '나도 잡힐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줘 범죄를 줄인다는 주장도 있다.

캐나다 마운트로열대 제인 홈그린(법학) 교수는 총회에서 'CSI가 배심원에게 미치는 영향'을 발표했다. 남녀 6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과학수사 드라마 시청자 중 19.7%는 과학수사가 해결하지 못할 사건은 없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지부 첫 활동=올해 총회엔 2004년 설립된 한국지부가 공식적으로 첫 대외 활동을 했다. 이희일 IAI 한국지부장(국방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소 감식관),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전영세 경감과 권일용 경위 등 3명이 참석했다. 지금까진 경찰청이나 국가정보원 등 관계 기관에서 개별적으로 참가했다.

이희일 지부장은 '증기를 이용한 지문 채취' 사례를 발표했다. 2005년 군부대 총기 강탈 사건 수사 중 고속도로 통행권에 고압의 증기를 쐰 뒤 지문을 찾아내 범인을 검거한 사례를 공개했다.

샌디에이고=이철재 기자

◆국제감식협회(IAI:International Association of Identification)=191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경찰의 지문감식관 해리 콜드웰이 처음 만들었다. 30년대 미국 FBI 후버 국장의 지원을 받아 과학수사계의 대표적인 단체로 자리 잡았다. 과학수사 기법과 정보를 공유하고 전문가 인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60개국 6800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2004년 설립된 한국지부엔 20여 명의 회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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