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업자 “손짐 덜고 등짐지기”(실명제시대의 세제: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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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거래 드러나 느는 세부담,낮춘 세율의 몇배/대기업도 “법인세 더 내려야” 인하폭 불만
『사실 현행 세제가 무자료거래 등을 감안해 만든 것인데 실명제는 실시해놓고 왜 조세구조를 완전히 바꾸지 않습니까. 세율을 약간 내린다고 하지만 앞으로 늘어날 세금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등포에서 철물점이나 개인 건축업자를 상대로 건자재 대리점을 운영하는 최모씨(45)는 『실명제로 가뜩이나 장사가 어려워진 판에 앞으로는 세금까지 많이 내게 됐다』고 호소한다.
최씨의 경우 실제로 연간 8천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지만 무자료거래가 많은 업종의 성격상 자연히 남들 하는대로 매출액 규모를 줄여서 신고해왔다.
지난해에는 3천만원으로 신고해 소득세 13만원,부가가치세는 과세특례자(3천6백만원 이하)로 10%가 아닌 2%의 세율을 적용받아 60만원을 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신고규모를 줄인다해도 올 매출을 최소한 7천만원 정도로 신고해야 하는 상황이 됐고 이 경우 소득세는 52만원으로 4배가 늘어난다.
부가가치세도 최씨처럼 특례자에서 일반과세자로 전환되는 사업자에 대해 한계세액공제제도를 두기로 했지만 그렇다해도 최씨는 3배 이상 늘어난 1백97만원의 부가세를 물어야 할 형편이다.
바로 이같은 경우들 때문에 업계에선 『정부의 이번 세제개편안이 실명제 전환에 따른 상황변화를 감안하기보다 세수증대에만 너무 치중한 것이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신고액이 실매출액의 90% 이상이 될 정도로 정상거래를 해온 대기업과는 달리 변칙·무자료거래 등으로 매출액을 크게 줄여서 신고해왔던 중소기업계는 이제 큰 어려움을 맞게 됐다.
법인세는 2%,소득세는 최고 3% 포인트를 깎아준다고 하지만 실명제로 신고액이 50∼1백% 이상 늘어나는 점을 감안하면 세금부담은 대폭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소기협중앙회 김정수 조사부장은 『번 만큼 세금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지금까지 얼핏 탈세로 나타난 차액부분이 기업주의 이익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원가나 거래가격 등에 포함돼 나름대로 시장구조를 형성해왔다는 점』이라며 『세율조정에는 이 부분이 반드시 감안됐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이번 세제개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데 34%에서 32%로 낮아진 법인세의 경우 『수출경쟁상대인 대만(25%)이나 싱가포르(30%)의 수준을 감안,4% 포인트 정도는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다.
또 대기업에 대한 세무조사 강화조치와 세탁기·TV 등 대기업 생산제품에 대한 특별소비세 인상도 기업의 투자심리 회복이나 경기활성화 방침과는 동떨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실명제가 실시됐다고는 하지만 기업들,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과연 실매출액을 어느정도 노출시킬지,또 이로인해 어느 정도의 세수가 늘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세율을 크게 낮춰줄 수만은 없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또 당장 기업의 입장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같은 시급한 목표달성을 위해 세수증대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같은 소극적 자세가 더 큰 문제를 파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세무사회의 정기용부회장은 『지나친 세금부담은 투자의욕이나 근로의욕을 위축시키는 차원을 넘어 이를 피하기 위한 각종 편법까지 발생시키게 될 가능성이 많다』며 『이렇게 되면 당초 모든 음성적인 거래를 양성화시켜 경제정의를 실천하자는 실명제 목적마저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이번 세제개편안 가운데는 부분적인 문제점들도 눈에 띈다.
부가가치세 면세점을 연간 매출액 4백만원 미만을 6백만원으로 인상시켜 수혜자를 현재 28만명에서 63만명으로 늘린다고 하지만 실제 과세자료가 양성화됐을 때 연 매출액이 6백만원 이하일 사업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의문시된다.
또 중소기업의 접대비 부분과 관련,실명제에 따라 손금처리할 수 있는 한도를 1천2백만원에서 1천8백만원으로 높인다는 것도 『접대비 지출액중 카드이용 비율이 30%를 넘지 못할 경우 그 차액부분을 손금처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이 그대로 남아있어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현재 카드로 회사비용을 지출하는 개인사업자는 30%에 불과하며 가맹점이 부족한 지방의 중소사업자들은 카드를 제대로 쓸 수도 없다.
또 올해말 종료예정이었던 중소제조업 세액감면제도(감면율 20∼40%)를 계속 운용하겠다는 것도 마이너스 효과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지 플러스 효과는 없는 셈이다.
공장·본사 이전을 위해 양도하는 경우 법인세·양도세를 1백% 감면해주던 규정을 양도세만 50% 감면해주기로 한 것은 세수는 조금 늘지 몰라도 공장의 지방이전을 촉진시켜온 산업정책과 어긋난다.
아무튼 조만간 있을 세제개편안에 대한 정치권과의 조율과정에서는 기업체,정부 어느쪽의 입장을 더 고려한다는 차원을 떠나 「실명제의 정착」을 전제로 삼아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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