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장에서>동학혁명 1백주년 기념전 참가 작가 유적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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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숨소리까지도 들릴 것같은 고요속에 1백년전 그날의 함성은 잠들어 있었다.「서면 白山,앉으면 竹山」이라던 白山(全北扶安郡白山面龍溪里)은 이젠 울창해진 나무들이 1894년 농민전쟁 당시흰옷에 죽창을 꼬나쥐었던 핍박받은 농민군의 위용 을 말없이 대신해주고 있었다.
이 땅의 아프고도 장한 민중사를 되새기기 위해 마련된「동학혁명 1백주년 기념전시회」(94년3월8~27일.서울 예술의 전당한가람미술관)에 참가하고 있는 작가 70여명이 1백년전 그날의함성을 찾아 1박2일 여정으로 서울을 출발한 것은 21일 오전8시. 이번 제1차 답사는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집결지로 4천여명이 모여들었다는 白山을 시작으로 농민봉기의 기폭제가 됐던萬石洑(全北井邑郡梨平面八山里),고부관아 습격의 집결지였던 말목장터,감영군과의 전투에서 농민군에게 최초의 승리를 안 겨주었던격전지 황토재(全北井邑郡德川面下鶴里),全琫準장군의 故宅(全北井邑郡梨平面長內里),서울 移都의 비文이 들어있었다는 선운사의 마애불,院坪농민전쟁전적지,姜甑山 유적,全州城등으로 이어졌다.
버스에서는『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베스트셀러작가가 된 미술평론가 兪弘濬씨(영남대교수)가 구수한 입담을 섞어가며 다음 답사지역에 얽힌 얘기를 들려줬고,각 유적지에선 역사학자 李離和씨가특유의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작가들에게 잘못 전해 진 기록을 정정하면서 史實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작가들로 하여금 이리저리 짓밟혀 살아야 했던 1백년전의 농민으로 돌아가 가슴의 요동을 느끼며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케 하는 일이란 그다지 손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작가들은 당시 농민군의 복장.나무칼.사발통문등을 보고 고개를끄떡이는가 하면 전적비가 서있는 황토재마루에선 초록 들판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모습을 드러낸 붉은 땅빛에 매료돼 스케치하는등 분주한 모습들이었다.이이화씨는『사모관대에 가죽신을 신은녹두장군의 초상화는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며『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커다란 인식을 남겨주는 것인만큼 역사적인 그림일수록 철저한 고증을 거치는 작가의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서양화가 金永悳씨는『효수당한 전봉준장군을 중심으로한 1백호짜리 그림을 그리다가 마지막 부분만을 남겨두고 답사를 왔는데 그분이 효수가 아니라 교수형을 당했다니 다시 그려야 할 판』이라면서도『답사 덕택에 틀린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으 니 다행』이라고 기꺼워했다.
조직위 金正憲위원장은『1차답사를 심화시킬 수 있는 2차 답사를 11월중순께 다시한번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히고『12월까지전시회의 구체적 기획과 작품을 마무리짓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洪垠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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