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지원금/실명제이후 몸살않는 현장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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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절차 까다롭고 몰라서 못쓴다/은행측 담보·보증요구 정부완 “딴소리”/긴급 운전자금 총규모의 22%만 신청
『지원한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은행창구에선 딴소리만 하고…. 정부발표만 믿었던 내가 순진했던 셈이죠.』
20인이하 영세 소기업에 긴급 경영안정자금을 지원한다는 정부의 발표를 보고 지난 20일 주거래은행을 찾았던 서울 영등포 S기계 대표 정모씨는 『정부와 은행이 따로 논다』고 불만을 말한다.
은행에서 대출결정만 하면 신보에서 자동적으로 위탁보증을 해 즉각 대출이 이뤄진다는 것이 이 자금의 특징이었으나 은행측은 정씨에게 『신용보증기관의 보증을 먼저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금융기관들 기피
정씨가 신문까지 보여주며 『자동으로 위탁보증되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자 은행측은 『내용이야 알지만 본점에서 아직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다』고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정씨는 뒤늦게야 금융기관의 친구로부터 『신보규정에 자동위탁보증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은행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면책조항들이 많이 있어 은행들이 이 방식을 가급적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정씨처럼 지원내용을 알고 찾아가기라도 하는 경우는 상황이 오히려 나은 편이다.
실명제 실시이후 중소기업을 위한 여러대책이 쏟아지고 있으나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어떤 지원책들이 있고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실정이다.
중소기협중앙회가 지난주 1백개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실명제와 관련된 정부지원책을 잘 알고 있다는 업체는 16%에 불과했을 정도다.
현재 정부가 발표,시행하고 있는 중소기업지원을 위한 주요대책은 ▲긴급운전자금 지원 ▲긴급경영안정자금 지원 ▲신용관리기금 어음재매입 한도증액 ▲상업어음할인 한도폐지 ▲신용보증기금 보증한도 확대 ▲비적격어음 은행할인 허용 ▲건설업체 발행어음 한은 재할허용 등이다.
○“내용안다” 16%
이외에 경제기획원·한은에서 우후죽순격으로 각종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대부분이 검토중이거나 관계부서와 협의를 거쳐야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원책이 이처럼 중구난방식이라는 점보다 더 큰 문제는 이정도의 대책마저도 현재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통업체나 영세제조업체 대부분에 해당되지 않고 있으며 설사 이용대상이 된다해도 실제로 대출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간이대출심사로 신속한 자금지원을 한다는 긴급운전자금의 경우 적격거래업체로 판정이 난다 해도 담보제공 등 조건면에서 일반대출과 별차이가 없고 심사기간도 의외로 길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다음주 돌아올 어음결제를 위해 이 자금을 신청하려던 서울 성수동 T공업사측은 『담보제공 능력이 없어 신보를 이용해야 됐는데 「긴급」이란 말에 걸맞지 않게 보증서 떼고,심사받고하면 최소한 보름이상이 걸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때문인지 이 자금의 지원이 시작된지 1주일째인 21일 현재 접수된 자금신청액은 총규모의 22.3%인 6백69억원이지만 실제지원액은 7.9%인 2백38억원에 불과한 상태다.
영세기업을 대상으로 총 2천억원을 지원하는 긴급 경영안정자금의 경우는 21일까지 49%의 자금신청이 일단 접수돼 긴급운전자금 지원보다는 이용률이 높은 상태다.
어음할인을 못하거나 거래처 부도로 자금난을 겪는 기업·신생기업 등을 위해 5천만원(비제조업체는 3천만원까지)의 범위안에서 최장 3개월간 지원하는 이 자금은 사업자등록증·소득세 원천징수집계표·부가세 공급가액증명원 등의 서류를 갖춰 신청하면 신용보증기금의 위탁보증을 통해 지원토록 돼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앞서 정씨의 예처럼 신보의 자동위탁보증을 은행측이 꺼려 하는데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동안 은행거래가 없다보니 대출심사 과정에서도 기피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같은 자금을 필요로 하는 업체중 상당수는 무자료거래를 해온 탓에 관계서류 발급과 제출 과정에서 노출될 우려가 있어 자금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
상호신용금고 등의 어음할인을 늘리기 위한 신용관리기금의 어음재매입 한도 증액조치는 현재 영세중소기업들에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있으나 자금지원규모가 너무 작은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주)삼화상호신용금고의 경우 지난 17일 신용관리기금에서 4억원을 어음할인 가능액으로 추가배정받았으나 5일만에 60%가 소진됐고 다음주초쯤이면 더이상 어음할인을 해줄 수 없는 상태다.
이 금고의 김경길사장은 『이번 증액조치가 신용금고가 먼저 할인을 해준뒤 신용관리기금에 재할인을 하는 방식이어서 자금력이 부족한 신용금고는 어음할인을 무조건 해줄 수도 없는 형편』이라며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자금지원규모를 더욱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상업어음의 할인한도 폐지조치는 이미 지난 4월부터 시행돼오고 있는 것.
이번에는 은행측에 좀더 적극적인 매입을 지시,실명제여파를 줄인다는 취지지만 무자료거래에 따른 어음이나 융통어음은 여전히 취급대상이 아니다.
이병균 중소기업 연구원장은 『자료가 있는 진성어음이라도 담보를 요구하고,적격 또는 상장어음이 아니면 취급을 꺼리는 것이 은행』이라며 『은행이 지시처러 쉽게 어음을 할인해 줄 것 같으면 애당초 사채시장 어음할인이 왜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추석대목을 위해 이달초 1억여원어치의 원단구입 계약을 했던 남대문시장 의류제조업체인 P패션 대표 김모씨는 『판매업체로부터 받은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중도금을 마련하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혹시나 하고 은행을 찾았으나 「무자료 가지고 어딜 오느냐」고 면박만 당했다』고 전했다.
○영세업체 더 고통
물론 정부측도 무한정 자금을 풀수도 없으며,실명제 자체의 의미가 상실되는 무자료거래 어음의 할인이나 부도가능성이 높은 영세기업에 대한 지원까지 어려운 금융기관측에 부담을 지울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
재무부 관계자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실질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자금지원이 시작된지 얼마 안됐고 금융기관 창구에서 나중에 손실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리스크가 큰 영세기업에는 대출을 꺼리고 있다』며 『영세기업 지원을 위해 신용보증기금이 보증을 섰다가 돈을 떼이면 정부가 예산에서 지원해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경제의 밑바당을 이루고 있는 영세업체나 유통업체가 완전히 쓰러지면 아무리 우량한 중견기업이라도 독불장군이 아닌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이 중소기업계의 지배적인 의견이고 보면 당분간 형식을 떠나 중소기업 사정에 맞는 현실적인 지원책마련이 절실한 상태다.<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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