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약효 거두려면/송병락(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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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떤 분이 얼마전 실명제는 경제성장에도 좋고,경제안정에도 좋고,소득분배에도 좋다고 한 바 있은데 이 말을 들은 다른 한 분은 옛날 약장수가 장판에서 군중들을 모아놓고 이 약은 변비에도 좋고,설사에도 좋고,신경통에도 좋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만병통치” 그릇된 인식
미국은 실명제를 오래전부터 실시하고 있지만 경제성장이 잘 안되고 무역적자는 쌓여가며,소득분배는 MIT대 폴 크루그먼 교수에 따르면 과거 20년간 악화되었다. 그리고 세계 제일의 마약시장도 형성되어 있다. 이탈리아는 지도층이나 국민들이 실명제는 고사하고 법을 무시하고 각종 부패를 저지른 것이 생활화되어 지하경제가 제일 큰 선진국이 되었다. 일본은 실명제를 하지 않고서도 성장·분배·국제경쟁력면에서 선진국중 제일이다. 실명제가 철저히 실시된 구 소련 등 공산국가에서는 이중 경제와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이런 예를 드는 것은 결코 실명제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 효과를 모두 바로 알고 외국 사례를 잘 참고하고 부수정책도 잘 실시하여 꼭 성장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실명제는 약에 비하면 극약이다. 이를 시행한 다음날 수십년간 내려오던 사채시장이 자취를 감추고 부동산시장 등이 심한 침체상태에 들어갔다. 지금도 귀중한 국민의 돈들이 갈 곳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 좋은 약도 경우에 따라서는 부작용이 아주 클 수 있다. 그러므로 선진국들은 신약이 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시험한 후 시판을 허용한다. 일본은 특히 그러하다. 실명제라는 극약도 아직 복용하지 않고 그 효과분석만 계속하고 있다. 우리도 앞으로는 각종 신경제 정책을 오랜 시간을 두고 그 효과를 잘 분석한 뒤 시행하여 국민이나 경제에 충격을 취소화했으면 한다. 실명제는 대통령 담화문에서 강조됐듯 부정부패 방지가 주목적중 하나다. 이를 실시하면 경제성장도,분배도,안정도 모두 잘 된다는 식의 과대홍보로 국민들을 오도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부작용이 몹시 클 수도 있음을 잘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지하경제가 생기는 이유는 정부통제,시장경제체제의 미발달이나 불완전,그리고 범죄행위(마약거래,매음,힘센 자의 공갈·협박에 의한 거래,인신거래 등)의 셋이다. 범죄행위는 강도나 절도를 실명으로 하라는 것이 말이 안되듯 실명제로 막아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경제체제의 미발달이나 불완전에 의한 지하경제는 「비공식부문」이라고 하는데 하버드대 존 마이어 교수는 『한국경제는 근본적으로 「이중경제이고 불균형경제」로서 경제성장 과정에서 서서히 시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비공식부문은 후진국때는 아주 크고 선진국이 되면 줄어드나 전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통제와 지하경제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 따라다닌다. 정부통제가 심한 사회일수록 지하경제가 크게 된다. 공산사회가 그러한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은 한국에서 공장 하나 세우는데 얼마전까지 3백12개의 서류를 구비해야 될 정도로 정부규제가 심한 상황에서 지하경제의 규모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법을 지키면 기업이 망하고 어기면 범법자가 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지금도 금융실명제로 정부통제가 심해지자 돈이 뒤도 숨는 등 지하경제가 오히려 커지는 조짐이 보인다. 각종 법제도의 성공적 개혁이 지하경제 축소와 실명제 성공의 조건이다.
○금융·조세개혁 따라야
선진국의 실명제는 잘 발달된 금융제도와 시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러하지 못하다. 그리고 일본 등 선진국의 은행이나 금융기관은 민간기업이 소유하고 있으나 우리는 심한 정부통제 아래 있다. 금융실명제의 성공에는 금융비밀 보장이 극히 중요한데 정부는 항상 국민의 금융비밀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실명제의 성공에는 금융개혁이 극히 중요하다. 사채시장은 후진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 오히려 정부통제를 받는 제도권 금융기관보다 더 효율적인 경우도 많다. 그 대체시장을 속히 개발하지 않으면 대·중·소기업 모두 큰 피해를 볼 것이다.
매출액을 실명화하고 세금을 법대로 내면 도산할 중소기업들이 많다. 홍콩은 자본주의경제의 제일 원칙인 사유재산의 제도적 보장을 철저히 하고 있어 최고세율도 소득세 15%,법인세 16.5%로 아주 낮게 책정하고 있다. 대신 탈세는 철저히 방지하고 있다. 실명제의 성공은 조세개혁을 전제로 한다.
실명제의 성공은 또한 의식개혁을 전제로 한다. 지금은 세계경제 전쟁시대이므로 실명제는 한국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하다는 의식을 정책담당자나 국민이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체제는 자유경제체제이므로 실명제는 국민의 재산형성과 기업활동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일본의 유명한 한 경제평론가는 『한국에는 세계수준의 유능한 기업경영인들이 수없이 많은데 국가의 각종 정책수립에서 이들 「프로」들은 도외시되고 국제경쟁을 해본적 없는 「아마추어」들이 많이 참여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바 있다.
○「신경제」에 맞춰 천천히
최근 발간된 세계은행 「개발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세계 제일의 고도성장국가로 분류되었다. 한국경제가 이처럼 발전한데 대하여 공무원과 기업경영인들 모두 칭송받아 마땅하다. 앞으로 이들을 잘 대접하고 이들이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해 실명제도,신경제 5개년계획도 꼭 성장했으면 한다. 그리고 실명제를 콩 볶듯,그리고 단칼에 해결하려고 하지말고 너그럽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신경제 5개년계획에 맞춰 추진했으면 한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한국인을 불안한 분위기가 아니라 모두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속에서 마음놓고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서울대 세계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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