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평화의 길을 열어야 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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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27면

정치적 결정에는 역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역사 속에서 응결된 과제를 풀기 위한 해법 모색이 정치적 판단이라는 점에서다. 또한 정치적 결정은 새로운 역사 전개를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를테면 훌륭한 정치적 결정이란 명철한 역사의식의 소산이어야 한다. 오는 28~30일 평양에서 남북한 정상이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은 현시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결정처럼 보인다. 걱정도 앞서고 비판적 제언도 있을 수 있다. 정상회담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장소가 또 평양이냐며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선용 이벤트를 위한 노림수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정상회담이 대선 국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부수 효과가 곧 본질은 아니다.

남북한 정상이 다시 만나기로 한 정치적 결정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우선 동북아 국제정치의 진행 국면에서 볼 때 시기적으로 적절하다. 북핵 문제는 이미 9·19 공동성명에서 큰 틀의 해법이 제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2·13 합의조치의 실천에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기로 합의된 터였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가 동북아 평화질서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6자회담의 전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남북한이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다. 물론 긴장과 대립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기본틀이라면 과연 현명한가? 남북한 간 적대적 균형을 전제로 한 해법은 너무나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반면 남북한이 한반도 평화를 선도함으로써 동북아의 평화를 촉진하는 방안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지난 7년의 구도가 그러한 판단에 기반하고 있었고, 남북한 정상이 다시 만나기로 한 결정은 그 의지를 재확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남북한이 6자회담의 큰 틀 속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디딤돌을 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정상회담은 그 문을 여는 돌파구와 같다. 남북한 대립 구도의 틀을 깨고 한반도 해빙의 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남북한에 주어진 역할이 있음을 인식하는 공감대는 매우 중요하다. 북한이 여전히 자폐적 논리에 갇혀있다면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많은 의제가 논의될 수 있다. 우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북측의 의지를 재삼 확약받
아야 한다. 핵 문제는 북·미 간 문제이면서 동시에 한반도 평화체제의 전제이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사안이다. 지난 7년간 교류협력 결과를 평가하고 확대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아울러 남북관계의 제도화 방안도 논의돼야 한다.

제도는 행위와 인식 변화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상회담 정례화를 비롯해 연락대표부 설치 등의 제도적 장치들이 의제가 돼야 한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치적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외교관계의 정상화, 국제적 보장 등 국제정치 영역의 조건들과 함께 남북한 당사자의 의지와 합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향후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예비 단계로서 한반도 평화선언에 합의하게 된다면 매우 의미 있는 회담이 될 것이다. 현 시점 남북한이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풀기 어려운 사안들도 있다. 앞으로 시간을 두고 이러한 난제들도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를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정상회담은 신뢰를 구축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대립과 균형, 힘에 근거한 평화 접근법이 유일한 통로는 아니다. 지금 남북한에는 평화정착을 위한 인식적 공감대를 확대하고 그 실천 방법을 학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남북한은 오랜 갈등과 반목을 딛고 일어나 이제 평화를 향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한반도 내 대립과 적대적 균형에 근거해 진행됐던 동북아 국제정치 역사, 이제 남북한이 평화의 메아리로 대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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