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22> 쿠베르탱은 왜 열두 번이나 영국에 갔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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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16면

머나먼 100여 년 전의 얘기다. 쿠베르탱(사진)이라는 프랑스 귀족이 5년 사이 12번이나 영국에 갔다. 그때가 1883년부터 1887년까지. 쿠베르탱의 나이로 따지면 스무 살부터 스물네 살 때였다. 그는 틈만 나면 영국으로 갔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고,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닐 때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명망 높은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그의 직업은 정치가나 외교관이 아니었다. 그는 교육자였다.

그가 그처럼 영국을 자주 찾아간 이유는 뭐였을까.

그저 여행이 아니었다. 뭔가 필요해서였다. 그는 배우길 원했다. 영국 공립학교의 교육을 관찰하고 경험해서, 그 교육철학을 얻고자 했다.

당시 영국은 유럽 최대의 강국이었고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다. 그의 조국 프랑스는 1870년대 프러시아 전쟁에서조차 형편없이 진 패전국이었다. 그는 패전의 원인이 ‘국민 자신 속에 존재하는 나약함’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나약함을 강인하고 건강하게 바꾸어줄 수 있는 모델이 영국의 공교육에 담겨 있는 스포츠 철학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심취했다. 영국 퍼블릭 스쿨에서 국가가 키우는 미래의 주인공, 그들의 가슴에 스포츠가 어떻게 심어지며, 훗날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떤 동력이 되는지를 보고 배웠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교육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스포츠가 지적, 도덕적, 사회적 시민형성의 가장 근본적인 교육수단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한번 더 읽자, 지적! 도덕적! 사회적!) 자신이 영국에서 본 럭비의 ‘팀’이 인간 협동의 가장 완성된 전형, 곧 민주주의의 예비학교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스포츠에서 요구되는 협동, 상호 존중의 정신이 사회에 스며들게 했다. 그런 개혁을 통해 프랑스는 세계의 리더였던 영국·독일에 뒤지지 않는 국력을 갖게 됐다. 프랑스를 건강하게 성장시킨 그는 스포츠를 통해 세계 평화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신념을 키웠고, 1896년 그리스에서 근대올림픽이 열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지난 8일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꼭 1년 앞둔 날이었다. 여기저기서 ‘올림픽 D-365’에 대해 말했다. 그래서 쿠베르탱이 생각났다. 그의 올림픽 정신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가 패전국의 교육자로서 강대국 영국의 교육을 통해 배워온 ‘자유와 스포츠의 철학’이 그 나라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의 현실과 대비됐다.

우리는 4개월 뒤면 대한민국 최고의 리더를 뽑아야 한다. 리더가 되고 싶다는 후보 가운데 쿠베르탱처럼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교육개혁의 비전을 제시하는 인물이 있다면 표를 던지고 싶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스포츠와는 담을 쌓고 지낸 것 같다. 정당한 경쟁을 할 줄도 모르고 페어플레이나 스포츠맨십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그런 리더와 조직에서 어떤 사람을 키울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미래가 걱정된다. 나 스스로 초등학생 두 명의 학부모로서 가뜩이나 지금 우리 교육이 지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완성된 시민을 만들어줄지 의문을 가질 때가 많은데 말이다.
누구, 쿠베르탱이 되고 싶은 사람!
네이버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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