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보다 중요한 건 사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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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29면

와인을 평가할 때 ‘테루아르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찬사를 듣게 된다. 테루아르를 표현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포도밭의 특징을 와인의 맛에 잘 담아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부르고뉴의 특급밭 샹베르텡의 와인은 남성적이고 향기로우며 힘차고, 뮤지니의 와인은 여성적이며 실키하고 우아한 맛이 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해 사이에 테루아르를 잘 표현하는 것은 와인 제조에서 하나의 이상형이 되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생산자가 만드는 같은 일급밭의 와인을 비교해 마셔보면 “정말로 테루아르의 차이가 와인의 맛을 결정짓는 것일까”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많다. 한 예로, 본 로마네의 일급 와인 레 보몽을 임마누엘 루게가 만든 것과 크리스토프 페로 미노가 만든 것을 동시에 마셔봤다. 그러자 전자는 연한 색조에 우아하고 섬세하며 아름다우면서 복잡한 맛이 났고, 후자는 색깔이 진하면서 마치 잼을 먹는 것처럼 과일맛이 풍부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동시에 마신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아마 이 둘이 같은 포도밭의 와인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한편 루게의 레 보몽과 에세조는 각각 다른 포도밭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와인이나, 우아하고 고상한 맛이라는 명확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와인의 맛을 크게 좌우하는 요소는 인간이고, 그 뒤를 테루아르와 빈티지가 따른다는 생각이 든다.

5월에 부르고뉴를 취재할 때 방문한 자크 카셰는 매우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병입한 백 빈티지 와인이 보관돼 있는 그의 와인 창고는 아주 청결했고, 오래된 와인이 연대별로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런 카셰가 만드는 와인은 생산자의 성실한 캐릭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같은 포도밭이라도 흉년이었던 빈티지는 과일맛이 부족한 와인이 되어 있고, 풍작인 해는 그의 와인의 장점인 우아함이 두드러져서 마시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하늘에 순종하며 대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진솔하게 와인을 만드는 카셰의 생활태도가 와인에도 잘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나라는 다르지만,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신진 생산자 비비 그래츠도 그의 개성이 잘 표현된 와인을 만든다. 비비는 와인을 발효시킬 때 쓰는 작은 통(바릭)을 눕히지 않고 세로로 세워 양조한다. 이 독특한 방법으로 만드는 ‘테스타마타’는 이탈리아 와인 평론지에서 별 3개를 받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얻었다. 비비는 양조가이면서 화가이기도 하다. “나는 아티스트로서 독창적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다”고 거리낌없이 말한다. 과연 그가 만드는 테스타마타는 과일 폭탄처럼 파워풀해서 대형 캔버스에 극채색 물감으로 그린 밝은 바닷가 마을이 연상된다.

와인을 잘 만들려면 ‘천지인(天地人)’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사람’이다. 와인의 맛과 함께 그 생산자의 개성을 맛보는 것 또한 와인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 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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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시음기-‘테스타마타’>
농익은 과일향에 코가 아찔

비비 그래츠 테스타마타(Bibe Graetz Testamatta)는 2000년을 첫 빈티지로 해서 생산된 와인이다. 오너이자 생산자인 화가 출신의 비비 그래츠가 직접 집안 대대로 내려온 피렌체의 그래츠성의 화려함에 버금가는 라벨을 자신이 직접 그렸다. 그는 플로렌스(Florence) 토박이이다. 친구들과 와인을 즐기던 그는 직접 와인을 만들어야겠다는 신념 아래 와인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닌 문화적인 상품이라는 생각 아래 와인메이커인 알베르토 안토니오니와 함께 ‘테스타마타’를 만들어냈다.

‘테스타마타’는 영어로 ‘미친 머리(Crazy Head)’라는 뜻이다. 출시 이후 프랑스와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판매되었다. 국내에는 2000 빈티지만이 수입되었으며 지금은 재고가 없다고 한다. 이후 2003년 보르도에서 열린 빈 엑스포 (Vin Expo)에서 선정하는 ‘톱 텐 스타 와인 어워드(Top Ten Star Wines Award) 2003’에 톱 텐 와인으로 선정되면서 다시 한번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나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린 와인 행사에서 이탈리아 와인이 톱 텐 와인으로 선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지금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은 1860년대 옛 지도에도 포도밭으로 표시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땅이다. 지금은 평균 수령이 30년 정도 된 포도를 중심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오늘은 필자가 테이스팅해본 2000 빈티지를 소개해볼까 한다. 첫 빈티지는 7000병 정도 만들어졌다. 매우 적은 생산량이다. 마지막으로 출시된 2004 빈티지는 1만5000병 정도 생산되었다. 생산량이 두 배 가까이 뛰었지만 뛰어난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와인 메이커가 많은 애정을 쏟는다는 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루비가 조금은 색깔이 빠진 듯 보였다. 그러나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디캔터에서 약 1시간30분이 지난 뒤 피어나는 향기에 코가 아찔한 정도의 파워가 느껴졌다. 산조베제가 이 정도의 파워풀한 노즈를 뽑아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한 인텐시티를 지니고 있으며 블랙베리와 카시스 리쿼라이스 등의 농익은 과일향과 오크 터치와 허브 에스프레소 등의 향기가 기분 좋게 느껴진다. 일반인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한다면 보르도 와인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복합적인 맛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플라워 캐릭터의 은은한 향기가 그리울 정도로 약간은 강하게 느껴지는 향기들이 조금 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잘 정돈된 느낌의 타닌과 신맛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고, 제법 길이감이 느껴지는 마무리 맛과 보디감은 와인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약간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을 주지만 이탈리아 수퍼 투스칸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와인이다. 파스타나 피자와 좋은 궁합을 이룰 듯하며 빈티지에 관계없이 잘 만들어진 와인이다.
이준혁(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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