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시인학교 황금찬교장(일요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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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시로 「사랑의 가교」 만들죠”/파도소리속 시인­애호가 “다정한 대화”/남녀노소 함께 매년 3∼4백명 참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해변시인학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말∼8월 초순께면 해마다 전국에 시인과 시애호가 3백∼4백명이 동해 바닷가로 모인다. 이들은 방학으로 국민학생들이 떠난 조그마한 학교를 하나 빌려 「해변시인학교」란 교명을 현수막으로 내건다.
교장·교감·교무주임·담임도 뽑고,시인 2∼3명씩의 지도교사에 시애호가 20∼30명씩으로 반을 갈라 학교체제를 갖춘 이들은 3박4일동안 학교내에서 공동취사·합숙을 해가며 시와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바쁜 일상에 쫓겨 묻어둔 인간다운 이야기들을,처음 만난 얼굴들일지라도 시를 매개로 깊이깊이 나누는 것이다.
○7월말께 문 열어
올해도 이 해변시인학교가 시인과 시애호가 4백9명이 모인 가운데 지난 7월30일부터 2일까지 강원도 강릉시 사천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시는 평생 좋아해왔는데 시가 무언지 몰라 배우러 왔다는 77세 노인도,일본에서 대학교수를 하고있는 재일교포도 참가해 시는 곧 끝없이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 자체임을,시를 좋아하고 알고픈 그들 자신이 곧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운 시임을 느끼고갔다.
『사랑의 비늘이/아직도 잠들지 않은/모래언덕에 앉아/피리를 불면/물새처럼 날아오는/바다 바다 여름 바다//불꽃같은 열기가 식고 /바다에 등불이 꺼지면/이베리아 반도/어느 고독한 섬 물새처럼/파도 소리가 그리워/빈고동들이 울고 있어라.//바다는/여름 바다는/사랑과/미움/그 사이에/살결 깊은 가슴으로/열리어 있었다.』
줄곧 해변시인학교 교장으로 추대되고 있는 시인 황금찬씨(75)의 시 『바다환상곡』 후반부다. 해변시인학교 교장직의 세상의 하고많은 감투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황씨를 만났다.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해변시인학교가 설립됐습니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꽃같은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해서죠. 시인도 좋고 군인도 좋고 처녀도 좋고 노인도 좋고. 세상에 파도소리 들으며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나쁜 심성이 있겠습니까.
그 이야기가 바로 시 아니겠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를 좀 더 부드럽게 인간답게 나아가게 하자며 79년 학교가 세워졌지요. 78년 작고하신 민족서정시인 목월의 유지이기도 해요. 시 본래의 순수기능으로 인간의 심성을 닦아 부드러운 사회를 만들자는 목월의 뜻을 따라 미망인 유익순여사와 아드님 박동규씨(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가 15년째 물심양면으로 이끌고 있지요.
○“가장 아름다운 감투”
­지금까지 쭉 교장을 맡아 시인·시애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것은 무엇입니까.
▲시는 별것 아니면서 또 별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시인들과 이야기 나누기가 더 힘들데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아무래도 시의 전문적인 용어들이 동원돼야 해요. 그 전문성에 인간의 소박한 정서가 얼마나 차단당하는지 몰라요.
그러나 학생,즉 시애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 소박한 심성들이 그대로 제 가슴에 별이되어 박혀요. 그들은 백지상태에서 시인의 말을 받아들여 점점 채색돼가며 시인들보다 더 아름다운 말들을 해서 제가슴을 흔들어 놓아요. 그게 시아닙니까. 『오늘밤 바닷가에서 제게 한 말을 그대로 써보세요. 그리고 운율과 토씨를 잡아보세요. 그러면 시가 되는 거예요』하고 말하면 그들은 정말 좋은 시 한편씩을 남기고 시인이 되어 졸업하지요. 아마추어시인이 되어 그들이 돌아간 제각각의 사회를 생각해봐요. 악하겠어요? 아름답겠지요. 사회에서 시의 역할은 참으로 별것입니다. 인간 본래의 착하고 아름다운 심정을 썩지않게하는 소금같은 것이지요.
­선생님은 중·고등학교 교단을 33년간 평교사로만 지키다 정년퇴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해변시인학교 「교장」은 15년씩이나 지키고 있습니까.
▲교장이나 교감,심지어 주임 한번 맡아보지 않았지요. 그리고 문단의 무슨 권위있는 장도 맡아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시를 쓰기위해서였지요. 그런데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해변시인학교 교장직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어요.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부르는 「교장선생님」하고 시인이나 시애호가들이 1년에 3박4일간 바닷가에 세운 해변시인학교에서 「교장선생님」하고 부르는 그 소리하고는 땅과 하늘 차이에요. 내 평생 얻은 직책중 가장 높고 좋은 것이지만 후배시인님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가져가세요.
­선생님은 46년부터 10여년간 강릉농업·강릉사범학교 교사로 계시면 포항에서 최북단 고성에 이르는 동해안문학을 일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56년 중앙문단에 나온이래 지금까지 시집·시선집총 35권을 펴내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펴고 계십니다. 선생님 자신에게 있어서 시는 무엇입니까.
○목월 유지로 시작
▲시가 좋아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작을 하는동안 얻어지는 내 즐거움을 위해서입니다. 나자신과 사물을 돌아보며 창조하는 즐거움과 그것을 남의 가슴속에 꽃과 별로 전달하는 즐거움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사랑의 가교라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시키는 시와 시인이 있는한 이 세상엔 언제나 꽃이 피고 있을것입니다. 나는 죽고 또 죽어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 즐거움과 사람들 마음속에 선한 꽃한포기 심어주기 위해 시를 쓰겠습니다.<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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