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담배도 끊고「어른모시기」심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허화평(17기)이나 장세동 모두 그 기수에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요. 하나회 내부에서도 그들은 알아줬지요. 전대통령은 허 수석의 두뇌나 능력이 탁월함을 인정했어요. 그러나 틀렸다 싶으면 자기 주장을 펴는 그가 때때로 거북스러웠지요. 반대로 장 실장은 전대통령 앞에서「노」라는 단어를 몰랐어요.「노」다 싶어도 자신을「예스」쪽으로 갖다 맞췄지요. 그렇다고 전대통령은 과거 박대통령처럼 박치기를 시키거나 충성경쟁을 유도하지는 않았습니다. 5공 창업의 프로그램을 짰던 허화평이나 실병력 관리자였던 장세동은 업무경계를 명확히 하면서 가급적 서로 간섭하지 않았지요..』

<육사 16기 선두주자>
전대통령은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그리고 수경사 30경비 대대장을 지내 경호업무를 꿰뚫고 있었다. 전대통령 밑에서 경호실장 하기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장씨가 털어놓았던 말. 『나도 경호실 작전보좌관·30경비단장·30대대 작전 장교 등 청와대 주변근무를 만5년 했기 때문에 업무파악 하는데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른(전대통령)이 워낙 경호실 업무를 소상히 알고 있어 월권이나 근무태만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대통령과 장 실장의 첫 만남은 월남전에서였다. 65년 맹호부대(수도사단)1진으로 참전한 장 대위 중대는 한국군으로는 처음 베트콩 사살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베트콩의 매복에 걸려 오른쪽 어깨 밑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됐다. 거기에서 월남을 시찰중인 전 중령을 만났다. 전 중령은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 정규 육사출신들이 몸을 너무 사린다는 보고를 해 현지확인을 위해 온방문단의 일원이었다. 정규 육사의 큰형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전 중령은 장 대위의 활약상과 부상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장 대위는 그후 이소동 소장의 백마부대(9사단)가 파월 될 때 사단장의 전투 자문역으로 다시 월남땅을 밟았다. 67년 11월 귀국하고 나서 그는 전두환 중령의 수경사 30경비대대 작전장교로 발령 받았다. 30경비대대에는 육사17기의 김진영(전 육참총장)·안현태(전 경호실장)대위가 있었다. 그는 전방 소대장으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던 한해 후배인 김진영과 특히 친한 사이다.
그가 전중령이 이끌던 하나회에 들어간 것은 이 무렵이었다. 창설멤버보다 4년 정도 늦은 셈이다.『장씨가 하나회 가입이 늦어진 것은 알려진 것처럼 호남출신(전남 고흥)이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는 80년 초까지 서울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장씨는 서울의 창신국교와 성동기계공고를 나왔다). 초기 하나회는 인간관계를 잘 챙기는 보스형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뤘어요. 그런데 장 실장은 인맥을 잘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며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었지요. 하나회의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가입이 늦어졌고 뒤늦게 일종의 스카우트를 당한 셈이지요.』(Z씨)
70년 11월 전 대령은 월남에 가면서 장 소령을 연대 정보 주임으로 데리고 갔다. 장 소령은 한국군 장교로선 유일하게 월남전에 세번 참전한 기록을 세웠다.

<월남참전 3번 기록>
정글 전투에서 두사람은 더욱더 두터운 공동 운명체 의식을 갖게된다. 그 후 전 대령은 1공수 특전여단장·청와대 차장보로 옮길 때도 장씨를 데리고 다녔다.
경호실장을 맡으면서 장씨는 완전 무결을 추구했다.『경호업무에는 2중 3중의 장치가 필요하다. 상대방은 조준해 먼저보고 쏘는 만큼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한다. 잊어버리거나 판단이 틀릴 때, 행동이 잘못됐을 때를 단계별로 나눠 대비책을 강구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복무방침이었다. 그는 하루 24시간을 오로지 전대통령을 위해 바쳤다. 전대통령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은 경내 산책부터였다. 장 실장은 매일 새벽 먼저 산책로를 답사·확인한 후 전대통령을 모셨다. 낙엽을 치우는 것은 물론 새똥이 떨어지는 것도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는 산책로 주변 화강암 계단에 떨어진 까치똥이 잘 지위지지 않자 화학약품까지 고안해냈다.
장 실장은 좋아하던 테니스도 하지 않았다. 담배와 술을 끊은 것은 물론이다.『테니스하다 잘못해 넘어지거나 상처가 나면 흉한 모습으로 대통령 앞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장씨의 이야기)
심지어 식사도 절식을 했다. 황선필 대변인이『왜 식사를 조금 하느냐』고 물었더니 장 실장은『경호업무의 기본이다. 식사를 많이 해 배탈이 나면 그 순간 의무를 다하지 못할까봐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했다.『업무에 집념을 갖고 있으면 투시력·영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루는 오소리가 청와대 철조망에 잘못 들어와 근무자가 총을 쏜 적이 있었지요. 잠을 자다가 무슨 소리냐고 물은 적이 있지요. 상황실에선 아직 총소리를 파악하지 못했더군요. 집중력이 생기면 말초신경에 영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경호 위해 절식도>
이 같은 장 실장의「완벽주의」는 경호의 교과서처럼 비쳐졌다. 그러나 그런 완벽주의는『안됩니다』는 직언을 할 수 없는 근무체질로 굳어지고 과잉보호로 흐를 소지가 있었다는 게 그의 복무태도를 비판하거나 아쉬워하는 하나회 내부의 지적이다. 그보다 하나회에 먼저 들어온 민병돈·최평욱·허화평·김진영씨 등이 전씨를 대하는 태도에 다소 여유가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장씨는 경직돼 있었다.<박보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