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조사국장|세무조사「칼」쥔 "한국10대실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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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세청은 흔히 「경제안기부」 또는 「경제포도청」으로 통한다. 단순히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만 하는게 아니라 원활한 징세행정수행을 위해 기업 등 경제주체의 과세관련 정보수집 기능과 탈세를 다스리는 기능까지 맡고 있다는 의미다. 국세청이 일개 외청 수준을 넘어서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크게는 나라의 조세권, 작게는 세무조사권이라는 강제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경제포도청의 「수사반」역할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제안기부의 「정보원」역할을 하는 국세정의 핵심이 바로 조사국이다. 국세청 조사국은 서슬 퍼런 세무조사의 칼을 휘두르면서 빼먹은 세금을 추징하고 형사고발까지 하는, 따라서 기업하는 사람들에겐 때로 우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무조사는 최악의 방법인 동시에 최종의 수단』이라는 말처럼 세무조사를 하는 조사국 역할은 성실납세 풍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필요악이라는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국세청 조사국은 잘 나서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나서면 그 대상이 기업이든 개인이든 성할 수가 없다. 지난 5월말 발표된 포철과 박태준 전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는 국세청 조사국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정치적 사찰이라는 의혹이 일부 제기된 가운데 진행된 이 조사를 통해 「철의 대부」박태준씨는 국세청 조사반의 파상적인 공략에 엄청난 재산가이자 수뢰와 횡령에다 탈세를 일삼는 파렴치범으로까지 낙인 찍혀 재기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세무조사를 결정하고 지휘하며 기업들의 약점까지 포함한 깊은 경제정보들을 쥐고 있는 국세청 조사국장은 실로 막강한 자리다. 본청 조사국장은 본청과 6개지방청 8백여명의 정예 조사요원들을 다스리는 「세무행정의 야전사령관」이다.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국세청장에 기용되어왔듯이 본청 조사국장은 국세청장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 발탁된다.
조사국장이 수집한 고급정보는 항상 청장에 직보되며 이는 다시 대통령에게 보고되기도 하는데 안기부가 수집한 정보 이상의 가치로 인정받는다. 조사국장은 또 특정기업의 존폐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세무조사와 관련된 사항을 청장과 단 둘이서 결정한다. 따라서 조사국장은 청장을 아무 때나 만날 수 있고 가장 자주 청장에게 보고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때로는 정치적 사찰목적의 무리한 세무조사도지휘하고 잘 나가는 기업도 결과적으로는 무너뜨리는 악역을 맡아오기도 했던 것이 조사국장이다.
「국세청의 꽃」조사국장은 한국의 10대 실세로 불릴 만큼 실세중의 실세자리며 정통세무관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엘리트 코스이기도 하다. 추경석 현 청장과 임채주 차장 등 지금 국세청을 이끌어 가는 핵심들이 과거 명조사국장 출신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세무조사란 것이 조사에 관한 노하우는 불론 세금 전반에 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조사국장은 현장과 이론을 모두 궤고 있어야만 한다.
지난 66년 재무부 사세국이 분리돼 국세청이 개청한 이래 그년동안 18대에 걸쳐16명이 조사국장을 지냈다 .초대 조사국장이었던 서영철씨와 2대, 6대의 이철성씨가 두 차례씩 역임한바 있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반 정도 되는 셈이다. 70년대까지는 조사국장의 재임기간이이보다 훨씬 짧았으나 80년대 들어 경제상황이 날로 복잡해지고 조사기능 또한 전문화되는 추세에 발맞춰 재임기간도 2~3년으로 점차 길어지고 있다.
역대 국장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이 국세청의 바닥부터 거쳐 올라온 토박이 세무관료 출신이라는 사실이 눈에 띈다.. 청와대출신 서영철씨, 육사출신인 송순씨(11대) 등 외부영입이랄 수 있는 케이스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역대 국세청장에 군 출신의 낙하산 인사가 많았다는 점과 대조되는 것으로 오랜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문성이 필요한 자리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는 또 그만큼 배타적인 자리라고도 볼 수 있다.
출신지역별로는 경남이 6명, 경북이 5명 등 영남이 11명으로 단연 압도적이며 그 다음 충청 3명, 서울 1명, 함남 1명 등이고 호남은 한 명도 없다.. 이는 역대청장의 인선스타일이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조사국은 66년3월 국세청발족과 함께 세워진 4개국중 하나였다. 군 출신인 서영철씨는 이낙선 초대청장이 청와대 민원비서실 조세행정특별조사반장으로 있었을 때 보좌관으로 함께 일했던 계기로 첫 조사국장이 됐다.
서국장은 66년 세수를 65년의 4백20억원에서 무려2백80억원이나 늘리겠다는 이 청장의 「세수 7백억원 작전」을 저돌적인 세무사찰로 이루어 보려고 애썼다. 서 국장은 여러 기관의 세무사찰권이 국세청으로 일원화되자마자 66년7월 처음으로 방직·제지·목재등 업종의 88개 업체에 대해 일제 사찰을 벌였고 녹색신고제 도입을 추진하는 등 뚝심에서는 알아줬다
60년대는 조사국의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처럼 세무사찰의 양적 확대에 열을 올려 세수기반이 크게 확대 됐으나 부작용도 컸다. 특히 수출입국의 불을 댕기기 시작한 때여서 기업들이 『국세청이 수출시책에 역행해 수출역군을 못살게 군다』는 내용의 각종 탄원을 당국에 무더기로 내기도 했다.
70년대 초반에는 여러 사람이 단명으로 조사국장을 거쳐갔고 70년대 후반 한용석(현 한국증권금융회장)송순씨의 재임기간엔 부가가치세 시행을 위한 조사작업에 온 조사인력이 매달렸다.
국세청 조사국의 기능이 강화된 것은 80년대 들어서부터다.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통해 매겼던 법인세가신고납부제로 바뀌면서 조사국은 굵직한 탈세를 잡는 일에 치중하게 됐다. 또 전두환 정권이 경제계를 다스리는 방법의 하나로 국세청을 동원하곤 하면서 조사국은 대형 경제사건의 중심에 서게된다.
5공 출범과 함께 조사국장을 맡은 장병정씨( 현주류공업협회장)는 지하경제가 사회문제화하자 사채업자에 대한 대대적인 사찰을 벌였고 5공 최대사건이라는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처리했다.
현재의 국세청 조사국 위상을 다진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추경석 현 청장이라 할 수 있다. 추 청장은 83년2월부터 86년6월까지 역대 최장수인 3년4개월간 조사국장으로 있으면서 명성사건·영동개발진흥사건·정내혁 사건 등을 파헤쳐 세무조사의 새로운 전형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무조사에 최초로 금융추적방법을 쓴 명성사건은 추 국장의 집요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명성에 대한 세무조사가 지지부진한 상태였던 83년7월31일 김철호 명성회장이 『강호제현에게 드리는 글』이란 제목의 광고를 통해 세무사찰을 반박하자 국세청은 초비상이 걸렸고 추 국장은 요원들과 함께 명성의 주거래은행에서 연일 밤샘을 하는 끈질긴 추적 끝에 결국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김동겸 대리의 수기통장을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한창 주가를 올렸던 명성은 결국 이로 인해 덧없이 분해되고 말았다. 그는 또 서울청 등에 특별조사반을 편성하고 정보수집과 내사활동 전담기구를 신설하는 등 현재의 조사국 조직 틀을 만들었다.
5공 말기와 6정조기인 이근영 국장(현 국세심판소장)때는 범양상선 사건과 이창석·전기환씨 등의 5공비리세무조사가 꼽힌다. 범양상선 사건의 경우 박건석 회장이 국세청 출두를 앞두고 자살했다는 점 때문에 국세청이 한때 해명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임채주 국장 시절은 5·8조치를 위한 대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조사와 음성·탈루·투기소득에 대한 특별조사를 들 수 있다. 임 국장은 불과 2개월 동안 2백44명을 투입, 7백11개나 되는 재벌계열사의 부동산을 조사하는 정력을 과시했다. 지난 91년 정치적 사찰 여부를 놓고 논란이 거듭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주식이동에 대한 조사도 그가 해낸 일이다.
박경상국장(현 중부지방국세청장)은 현대상선과 포철조사를 비교적 매끄럽게 처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지난 6월말 직세국장에서 자리를 옮긴 허연도 현 국장은 경남출신으로 조사경험은 많지 않으나 직·간접세 분야를 두루 거쳐 앞으로 조사행정이 세원개발에 역점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적 관심사인 카지노 특별조사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느냐는 것이 허 국장의 첫 번째 과제다.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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