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급한 카스피해 석유外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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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국은행은 '2004년 세계경제 전망과 주요 현안'이라는 보고서에서 불안정한 국제 유가가 올해 세계 경제에 커다란 부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에너지 해외의존도가 97.2%를 상회하며 국가 1년 예산의 3분의 1이 넘는 38조원 상당을 해마다 에너지 수입에 쓰는 세계 12위의 에너지 소비대국이어서 더욱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근자에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중심으로 그려졌던 세계 에너지 지도가 바뀌고 있다. 러시아와 과거 동구권 국가들로 오일 라인이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전략적 지침하에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개발과 수출을 추진했으며 오일머니는 러시아 경제 발전을 견인해왔다. 이제 러시아는 OPEC 의장이 직접 찾아가 원유가를 조정할 정도의 핵심적인 산유국 반열에 올랐다.

이와 함께 흑해와 카스피해에 인접한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에 동시 다발적인 에너지 개발 붐이 일어나고 있다. 그 가운데 카스피해의 원유 매장량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국가 전체 매장량의 50%에 해당하는 2천1백80억배럴로 추정되며,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는 소련 당시 위성국가였던 카스피해 인근 국가들에 대해 지역 분쟁 유발, 러시아군 주둔, 전력 공급 중단 등의 군사력.경제력을 동원해 패권 유지를 위한 세력 팽창을 시도해왔다. 러시아의 야심대로 러시아와 동구권의 새로운 석유 카르텔이 형성될 경우 러시아는 에너지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해 냉전시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 오일 패권을 저지하고 러시아와 이란의 결탁을 막기 위해 카스피해 송유관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첫째로, 카스피해와 흑해를 가로지르며 구축된 러시아의 카스피해 파이프 컨소시엄(CPC) 송유관은 2001년부터 생산을 시작해 향후 하루 1백만배럴 이상의 원유를 유통할 계획이다.

둘째로, 이에 대적하기 위해 세계은행.유럽부흥개발은행.시티그룹.영국석유(BP) 등의 국제컨소시엄은 세계 최장(1천7백60㎞)의 바쿠~트빌리시~세이한(BTC) 송유관 건설을 추진했다. 올 연말이면 완공될 송유관은 지중해로 바로 이어진다. 향후 안전을 지키기 위해 미군 주둔까지 허용하고 있어 인류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송유관'으로 불리고 있다.

셋째로, 바쿠~트빌리시~에르주럼(BTE) 송유관 공사가 2006년 완공되면 새로운 오일루트를 통해 카스피해산 천연가스가 서방 시장으로 전달된다. 뒤이어 카자흐스탄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사업 등이 예정돼 있어 세계 석유시장의 새 판도가 그려질 것이다.

미국은 '제2의 중동'을 관리하기 위해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 장관, 에너지부.상공부 장관 등이 참여하는 국가에너지정책발전그룹이 주축이 돼 카스피해 인근지역을 특별 관리하고 있다. 해당 지역의 민주화, 경제 지원, 투자 환경 개선 제고를 미국의 국익에 연관시키기 위해 부처 간의 역할 분담과 유기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카스피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과 발전가능성을 간파한 일본은 새로운 시장 개척과 해당 지역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駐)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 일본 대사를 주축으로 경제 지원과 교육. 의료 지원에 나섰으며, 일본 문화 축제 등을 통해 문화 외교 공세까지 벌이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의 에너지 외교는 어디에 있는가.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 등은 새로운 전략거점으로 부상했지만 한국 외교에서는 여전히 주러시아대사관이 원격 관할하는 외교의 변방에 머물러 있다. 카스피해 산유국들은 에너지 전략의 요충지이며, 새로운 시장이요, 기회다. 더 늦기 전에 외교통상부.행정자치부.산업자원부 등의 유관부서가 중지를 모아 새로운 에너지 외교 전략을 조속히 수립하기 바란다.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