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달라진 서울발 뉴스|인권·시위서 경제·핵으로|외국언론 주한특파원들의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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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우리나라가 민주화, 북한 핵문제, 경제발전 등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됨에 따라 서울에 상주하는 외신기자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더욱이 일본 후지TV의 시노하라 마사토(소원창인) 서울지국장이 6일 군사기밀을 본국에 유출시킨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는 사건이 발생, 외신기자들의 활동이 주목되고 있다.
공보처 해외공보관실에 따르면 6월말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는 외신기자는 10개국 63매체 1백34명이다. 이중 외국인으로 서울에 파견된 기자는 50여명, 나머지는 현지 채용된 한국인이다. 언어·습관 등 여러가지 취재상의 어려움 때문에 본사로부터 파견된 외국인 특파원이 한 두 사람의 현지인을 채용해 활용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AP·로이터와 같은 통신사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취재력을 갖춘 한국인 기자를 6∼7명씩 고용하고 있다.
서울상주 특파원중 일본기자들은 수적인 면에서 단연 앞선다. 현재 일본 매스컴의 서울특파원은 16개 회사에서 25명이 나와 있으며 현지 채용한 일본 언론사소속 한국인 기자들까지 포함할 경우 전체 외신기자의 40%를 넘는다.
외신기자는 크게 나누어 본사에서 파견된 특파원, 현지채용 기자, 그리고 외국언론사와 일정기간 계약한 촉탁기자와 각 매체에 기사를 자유롭게 기고하는 프리랜서가 있다. 서방언론에서 일하는 한국기자는 대부분 본사기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으나, 일본매체에서 근무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계약직이고 기사를 쓰더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기사가 나가지 않는 등 「다른 조건」속에서일 하고 있다.

<본사 파견은 50여명>
외신기자들은 대부분 공보처해외공보관실 외신과를 공식창구로 삼아 외신기자 신분증(프레스카드)을 발급 받는 등 각종 취재편의를 제공받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공보처에 등록해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에 실제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신기자수와 등록된 기자수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프레스센터 18층에 위치한 외신기자클럽은 서울을 무대로 한 외신기자들의 본거지다. 이곳에 등록된 외신기자는 10개국 77개 매체 1백46명이다.
외신기자들은 여기서 서로정보를 교환하거나 상호친목을 도모하기도 한다. 외신기자클럽은 외무부의 월례브리핑 장소로 사용되며 권인숙·마광수·중광스님 등 다양한 한국인들의 강연회도 개최, 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외신기자클럽은 외신기자들뿐 아니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종찬의원 등 국내 유명인사들도 명예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어 일종의 사교모임장의 성격도 띠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894년 청·일전정과 1904년 러·일 전쟁 때 1백명이 넘는 종군기자들이 한국땅을 밟았으며 6·25 당시 또 한차례 대규모 종군기자단이 찾아왔다.
70년대까지 외국언론들은 동경주재 특파원으로 하여금 한국을 맡도록 했다. 그러던 것이 81년에도 화이트기자가 AP서울지국장으로 오면서 처음으로 서울상주 외국기자가 생겼다.
외신들이 본격적으로 서울에 몰려오기 시작한 것은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다. 당시 세계의 관심은 서울에 쏠렸고, 올림픽 때문에 서울을 찾은 외신기자들은 한국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실감하게 됐다. 정부의 북방외교 추진으로 공산국가들과 수교가 늘자 중국·러시아 등에서도 상주기자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88올림픽 전후 급증>
외신기자들이 전세계로 내보내는 한국에 관한 뉴스는 87년을 기해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6공이전 한국관련 외신보도의 「단골메뉴」는 인권문제와 시위였다. 그러나 외신의 관심은 점차 경제·남북한 관계·북한 핵문제 등으로 옮겨지면서 다양화됐다.
영국의 한 특파원은 이 같은 현상이 『외신의 관심변화라기보다는 한국사회의 상황변화』라며 『데모는 현저치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민주발전으로 정당성을 잃었다』고 말했다. 또 11년째 한국특파원 생활을 하고 있은 워싱턴 타임스지의 마이크 브린 기자도 『학생운동은 80년대 중방까지 정치문제의 가시적 상징이었으나 최근 이 같은 상징성이 퇴색, 이제는 뉴스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설명했다.
대신 그는 『북한 핵문제·한국경제 등이 주요 뉴스로 부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경우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나 내부변화가 자국의 안보와 직결돼있다는 인식 때문에 요즘은 취재의 80%이상을 남북문제·북한 핵문제에 할애하고 있다.

<학생운동 관심 줄어>
『한국경제가 물론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지만 솔직치 말해 일본으로선 한국경제가 아직 뉴스의 주요 이슈는 되지 못합니다.』
지난 80년부터 10년 넘게 서울특파원 생활을 해오고 있는 구로다 가쓰히로(흑전승홍) 산케이(산경)신문 서울지국장은 북한 핵문제나 북한-미 고위급 회담같은 안보문제, 종군위안부등 과거사문제가 서울발일본외신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들 외신기자들의 취재방법은 기본적으로 공개된 정보에 의존하는 편이다. 신문·방송·통신·잡지 등 국내매스컴의 보도를 70∼80%가량 받아 이를 정리해 본국으로 송고하고 있으며 나머지 20∼30%는 개인적인 취재를 통한다.
그러나 언론이 통제되던 4, 5공 때는 거의 50%정도 개인적인 취재를 통해 기사를 발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구로다씨의 설명이다.
이들이 취재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외신기자들의 가장 큰 불편은 정보부족이다. 미국의 한 방송사 특파원은 『한국에는 통계자료가 없어 지난번 한국의 이혼문제에 대해 취재할 때 애를 먹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또 브린기자는 정부의 정보에 대한 지나친 통제를 지적했다. 그는 지난 90년 북한 제4땅굴 발견을 단독 보도했으나 당시 국방장관이 국회에서 이를 부인하는 바람에 입장이 난처해졌던 일을 예로 들면서 『2주후 발표할 일을 왜 확인해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외신기자들은 또 국내부처 취재 때 어려움으로 업무소재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외무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처에서는 확인전화를 걸 경우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전화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결국 취재에 실패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3·5공때 후한 대접>
외신기자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군사독재정권 때 더 대접(?)을 받았다. 과거 군사정권하의 보도담당자들은 외국에 정권의 정통성을 알리기 위해 이들 외신기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신기자들은 자연치 군당국자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 등 개인적인 접촉이 잦았으며 이들을 통해 가끔 국내언론보다 먼저 굵직굵직한 정보를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후지TV 시노하라 사건 경우도 그가 취재목적으로 꾸준히 군내부에 인맥을 형성해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 유력신문의 한 특파원은 이번 사건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기밀로 분류해 보도자체를 차단하는 현실 때문에 생긴 사건』이라고 군정보의 과도한 통제를 비판했다.
서울에 상주하는 일본기자들의 경우 한국어 구사능력은 매우 뛰어난 반면 서방언론사 특파원들은 서투른 편에 속한다.

<정보 과잉통제 불만>
일본의 서울특파원들은 주로 한반도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로 일본내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기본적으로 익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발령 전 1년간 연세어학당 등에서 집중적인 한국어교육을 받고 정식 부임하게 된다
또한 구공산권출신 기자들은 북한에서 장기간 특파원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아 유창한 한국어실력을 자랑한다.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의 이반 자카르첸코기자, 중국 인민일보 서보강·신화통신 장충의기자가 이에 속한다.
이에 비해 서방특파원들은 주로 한국인 기자들에게 의존하는 편이다. 영국의 한 특파원은 『한국어공부를 시작하더라도 한국말이 어려워 3개월 넘기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외신기자는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그 수가 날로 늘어날 전망이다. <김국진·이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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