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찰 아닌 경협 … '선불'아닌 '후불' 가능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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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남북 정상회담은 공식 기구(국가정보원)를 통해 법률에 따라 투명하게 진행해 왔다."(이재정 통일부 장관, 9일 브리핑) "내적으로는 아주 투명하게 진행됐다고 자신한다."(김만복 국가정보원장, 8일 기자회견)

남북 정상회담 성사의 주역들은 유난히 '투명성'을 강조한다.

관계자들이 "뒷거래는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이유는 2000년 1차 회담 때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김대중-김정일 회담은 분단 55년 만의 첫 정상회담이란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산 회담'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4억5000만 달러란 거액을, 그것도 선불로 지급한 끝에 성사된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송금 절차가 차질을 빚자 북한 당국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김대중 대통령의 출발이 하루 늦춰지는 일도 벌어졌다.

'송금 특검'을 실시한 노무현 정부가 2차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2000년 때처럼 현찰을 건넸거나 건넬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게 다수 전문가의 얘기다. 돈을 주고 싶어도 7년 전과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계좌가 풀리기는 했지만 북한의 해외 계좌는 수상한 뭉칫돈으로 미국 정부가 가장 철저하게 감시하는 대상이다.

물자도 마찬가지다. 남북 관계에 오랫동안 종사한 전문가는 "미국은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는 원유량을 일일 단위로 점검하는데 다른 날보다 양이 많으면 그 이유를 따질 정도"라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현찰을 보내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무런 대가 없이 노 대통령과의 회담을 수락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다.

김 위원장은 작고한 정주영 현대회장의 '500마리 소 떼' 방북에서 보듯 한국의 주요 인사를 만날 때는 현금이든 선물이든 경제 지원이든 반드시 챙겨왔다. 8월 중 두 차례 방북한 김만복 원장이 김 위원장에게 불법 뒷거래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면 합의에 의한 모종의 보상을 약속하지 않았겠느냐는 얘기가 무성한 이유다.

선물 보따리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은 이른바 '북방 경제 특수'다. 북한에 초대형 인프라 건설을 경제 지원하고 이를 기반으로 러시아와 통하는 '시베리아 철도' 혹은 '가스전 사업'을 추진해 한국 경제에도 새로운 시장을 열어 나간다는 구상이다. 이런 구상을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으로 발표하면 시빗거리를 줄이면서 김 위원장에겐 회담의 대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 경제 협력에 밝은 한 소식통은 "북한이 남측의 대기업 자본으로 항만.공업단지 등을 조성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와 협상이 진행된 적이 있다"며 "그런 요구를 들어 주는 것을 전제로 정상회담 합의가 이뤄졌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제2의 개성공단 조성이나 평양~개성간 고속도로 개.보수, 남포항 현대화, 나진.선봉.신의주 특구 개발 등의 사업이 이어질 수 있다. 사회간접자본(SOC)건설을 위한 대북 차관이 제공될 가능성도 있다. 한나라당 정보위원장인 김정훈 의원은 "100억 달러 미만의 차관 제공을 약속했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통일부가 지난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SOC 건설, 전력 지원 등 북측이 요청한 16가지 경협 사업이 모두 이행될 경우엔 향후 수년간 9조~13조원이 필요하다.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에 이면 합의가 있다면 준비과정이나 회담 뒤 어떤 시점에서 결국 드러날 것이다.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내용이 무엇이든 '캐시(현찰)'가 아닌 '경협 프로젝트'이며 '선불'이 아닌 '후불제'일 가능성이 크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1차 회담 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 비용을 위해 '개인 금고'의 중요성을 잘 아는 김정일 위원장의 현금 집착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북한학과)는 "임기 말에 선물 없는 정상회담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며 "1차 때처럼 김정일 개인 주머니로 들어가는 '지원'은 아니겠지만 항만.철도 정비 등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예영준.남궁욱 기자<yyjune@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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