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없는 공무원(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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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한 원로예술인의 평생에 걸친 행적을 돌이켜보면 매우 다채롭다. 그는 일제때 그네들의 침략정책을 부추기는 작품을 발표했고,해방후 자유당 시절에는 독재정치를 돕는 정치활동을 폈으며,민주당 정부가 출범하자 민주주의 정치의 출범을 축하했고,5·16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라고 찬양했다. 72년 10월 유신때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오직 한가지 방법이라고 역설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 제자와 후배들이 그와같은 그의 행적 배경을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그것이 그때끄때의 내 소신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고 전한다. 「소신」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확실하다고 굳게 생각하는 바」다. 그같은 사전적 의미를 그에게 적용시킨다면 그의 하나하나 행적을 나무랄 수만은 없게 된다. 어떤 정치체제 아래서도 그는 그 체제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굳게 믿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사람이 모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혼자 옳다고 믿으면서 그대로 밀고 나갈때 그것을 가리켜 소신이라고 일컬을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느 경우에나 소신에는 「긍정적인 가치관」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소신이 개개인의 단순한 확신만이 바탕으로 돼있는 것이라면 부정이나 비리조차 개인의 소신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될 수도 있다. 가령 「다른 사람이 모두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 나도 똑같이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는 소신을 가진 정치인이나 공직자를 「소신없는 사람들」로 매도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은 『최근 비리척결의 여파로 일부 공직자들이 무사안일한 자세로 움츠러들고 있다』고 지적하고,『소신도 없고 자부심도 없는 공무원이라면 공직을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의 공무원사회에서는 무사안일을 마치 소신처럼 생각하는 자세가 팽배해가고 있다한다. 그러나 그같은 풍조가 비리척결의 여파라면 무사안일을 소신없는 행동으로 몰아세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제공에 혹 무리는 없었는지를 돌이켜보는 자리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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