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재소자에「권투교화」10여년 "『그릇된 욕망』과 싸워라"-「충의소년단」-이명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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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서로 다른 얼굴 모습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우리 이웃들 중엔 가끔 보통사람들의 심정으로는 좀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자기 희생적 사회봉사로 따뜻한 삶을 엮어내는 이들이 있다.
언제나 낯선 이방인처럼 상대하기 거북한 전과자, 그 중에서도 10대의 소년 수들을 복싱이란 스포츠를 매개로 10여년간 보살펴온 이명철씨(50)가 바로 그런 이웃이다.
『비정하기는 사각의 링이나 사회나 매한가지, 링에서 견뎌내지 못하면 거친 세파는 어떻게 헤치고 나갈 것인가.』
눈물과 땀을 뒤집어쓴 채 악몽 같던 과거에서 탈출이라도 하듯 필사적으로 샌드백을 두드리는 나이 어린 10대 재소자 복서들에게 던져지는 이씨의 추상같은 채찍질이다.
이씨가 가장 자랑스럽게 내미는 공식직함은 아마복싱 팀인 「충의소년단」감독.
서울 포이동에서 포이카 센터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자 지난 90년 8월부터 인연을 맺은 법무부 서울보호관찰 총 연합회 산하 보호 위원실의 강남지회에선 부회장으로 각각 불리지만 그가 무엇보다도 듣고 싶어하는 호칭은 바로 복싱감독이다.
이씨는 84년5월 인천 소년교도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인천충의소년단」복싱부를 창단, 91년 현재의 천안 소년교도소로 옮기기까지 전국 신인 선수권대회에서 세 차례(85, 89, 90년)나 종합우승을 일궈내 복싱 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화제의 주인공.
그가 복싱을 통해 소년 수들의 심성순화란 까다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법무부 총무과에서 말단 서무행정을 보던 지난 70년.
업무 차 당시 불광동에 위치한 서울 소년원을 찾은 그는 3백∼4백 명의 원생들이 적성과는 관계없이 목공반·라디오반등 기술 반에 편성돼 그저 시간 때우기 식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을 보고『이게 아닌데』하는 회의를 품게됐다.
2년 뒤 법무부에서 퇴직, 친구와 함께 시계 줄 제작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실패하고 이런저런 고생 끝에 그가 다시 안정을 되찾은 것은 광화문에 새로 차린 다방과 기원이 호황을 구가했던 76년.
수중에 돈도 좀 모이고 88서울올림픽 유치로 전국에 스포츠 붐이 일던 82년 그는 마침내 서울 소년원을 방문, 평소 마음먹고있던 「복싱을 통한 소년 수들의 교화」방안을 제의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서울 옥수동 출신인 그 자신 또한 이웃 약수동이나 금호동의 동네주먹들을 상대로 힘 자랑하다 오직 싸움을 더욱 잘하기 위해 성동 체육관을 두드렸으나 「글러브를 끼고 규칙에 따라 매를 주고받는 가운데」전혀 새로운 삶을 찾게된 체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소년 비행의 대부분은 순간적인 충동 때문이지요. 그러나 링에 올라 필사적으로 3분 3회전을 버티면서 황량한 마음에 인내의 나무를 심게됩니다. 처음엔 허황된 꿈이나 분노의 폭발로 때리던 샌드백이 차츰 흘리는 땀과 비례해 자신의 허점을 때리는 샌드백으로 변하지요.』
소년원장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강당 한 모퉁이에 링과 샌드백을 두고 약 보름간 30여명의 원생에게 정열적으로 복싱을 가르쳤지만 『그렇잖아도 툭하면 주먹부터 나가는 깡패들에게 사람을 때리는 권투를 가르치면 어떻게 하느냐』는 상부의 호통 한마디에 모든 복싱장비를 철수하는 설움을 겪었다.
이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가 「편견」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2년여의 설득공세 끝에 그는 마침내 84년 당국의 허가를 얻어냈고 장소도 장기수들이 복역하던 인천 소년교도소로 옮겼다.
이후 56년 멜버른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송순천씨가 교통비만을 받고 지도에 나서는 등 주위의 도움으로 전국 신인대회에서 세 차례나 단체우승 한 것을 비롯, 국가대표까지 물리친 이성기씨(28)등 유망주들을 배출하며 탄탄대로를 걷게됐다.
그러나 시련은 엉뚱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복싱에 한눈파는 사이 기원과 다방에 손님이 떨어져 문을 닫게된 것은 물론 옥수동의 살고 있던 집마저 내주고 전세로 나서게 된 것. 주위에선 또 그가 무슨 다른 흑심이 있어 재소자 복싱지도에 열을 올린다고 꼬집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교도소를 나온 복싱제자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딱한 처지를 그에게 하소연해와 시름을 늘려놓았다.
결국 그는 가장 취직이 잘 되는 세차 업을 자신이 운영하기로 마음먹고 88년 현재의 포이동에 카센터를 열었다.
그가 처음 인천 소년교도소를 찾았을 때 그곳을 방문한 어느 목사님이 『재소자들에게 절대 집 전화번호나 주소를 알려주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이것이 한낱 기우라고 주장한다.
뒷날 은혜를 잊고 해코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지만 이것은 자신이 마음을 열어놓지 않은 탓이라는 게 그의 확신에 찬 설명이다.
10여년을 동고동락하고서도 자신이 건재한 것이 산 증거란다.
그는 현재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발길이 뜸했던 천안 소년교도소의 복싱 팀 지원을 위해 「충의복싱후원회」(가칭)창설작업에 분주하다.
최한기 코치의 열성어린 지도 외에 한 차원 높은 복싱기술 접목을 위해 전 대표팀 감독 김승미씨의 특별 코치도 올해 내 실현 될 전망.
그는 아무대가도 없는 이런 일을 왜 계속하게 되는지 자신 또한 모르겠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유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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