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 본받자" 남미 좌파정권 '우향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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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에 투자하는 기업은 이 나라의 미래에 투자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해 11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7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스페인 통신회사 텔레포니카를 두고 한 말이다. 아르헨티나에 진출한 외국기업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국익을 해외로 빼돌린다며 '위선자'라고 공격했던 그가 1백80도 달라졌다.

지난해 4월 대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대표적인 좌파 포퓰리스트로 알려졌다. 유세장에서 공개적으로 재계를 공격하고, 메넴 전 대통령의 과도한 '자유시장 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망쳤다고 열변을 토했다. 재정긴축과 시장친화적인 경제정책을 주문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뉴욕 타임스는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취임 후 6개월 만에 반기업적인 자세에서 친(親)기업 정책으로 돌아섰다고 9일 보도했다. '뜻밖의 보수주의 행보'로 국제 투자자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과 루시오 구티에레스 에콰도르 대통령에 이어 남미의 신생 좌파정권에 '우향우(右向右)'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최근 두 달간 부에노스아이레스 카사로사다 대통령궁에서 재계 지도자들과 여러 차례 만났다. 그 자신이 아르헨티나병(病)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던 '부패한' 재계에 경제위기 극복의 동반자로서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민 것이다. 17%가 넘는 높은 실업률과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선 재계의 투자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연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를 점거하고 있는 좌파 시위대에 대해선 강경 진압 방침을 천명했다. 중산층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다.

대통령의 변신과 함께 아르헨티나 경제도 지난해 뚜렷한 회복세를 보였다. 페소화 폭락과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2002년 최악의 위기에 몰렸던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7.3% 고성장을 이뤄냈다. 올해도 5%대의 성장이 예상된다. 호르스트 쾰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지난 9일 "아르헨티나 경제가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1월 원주민들의 전폭적 지지로 집권했던 구티에레스 에콰도르 대통령도 집권 후에는 지지율 급락에도 불구하고 친기업 정당인 기독사회당과 손잡고 재정.세제.공무원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에콰도르도 4년 전 채무불이행 사태 이후 투자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좌파식 대중영합 정책으론 IMF의 구제금융에서 졸업하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에서다.

남미의 좌파정권 도미노 현상을 불러왔던 이들은 이제 앞서 집권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따라 경제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룰라는 집권 후 정부 지출을 줄이고, 공무원 연금을 경제논리에 맞춰 개혁하는 등 시장원리를 중시하는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왔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1월 3일자)는 "브라질 정부를 이끌고 있는 것은 룰라의 열정과 실용주의의 융합"이라며 "자신의 주장처럼, 룰라는 이론가(이데올로그)가 아니라 협상가"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남미 좌파정권들의 친시장적 행보에는 기존 지지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이들의 친기업적인 변신이 성공할지, 아니면 다시 남미병의 나락으로 떨어질지가 주목된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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