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파고 넘자” 고창 농민 420명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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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복분자의 고장인 전북 고창에서 농민과 기업이 합작한 최초의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창 농민 420명이 생산한 복분자를 전통주 제조회사인 국순당이 술로 만들어 파는 사업이다. 이를 위해 농민 420명이 15억3000만원을 대고 국순당이 6억원을 출자한 ‘(농)국순당 고창명주(주)’를 만들었다. 농민이 농산물 재배를 맡고 기업이 가공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농산(農産) 합작회사’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농산 합작은 일단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이 회사가 7월 4일 출시한 ‘명작 복분자주’ 20만 병은 보름여 만에 동이 났다. 추석을 겨냥한 2차분도 벌써 예약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고창명주 주주인 박용섭씨는 “농민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 놓고도 판로를 몰라 실패한 경험이 많다”며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최고로 잘하고, 나머지는 기업에 맡기는 게 농민과 기업이 모두 윈-윈하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상호불신 극복에 의기투합=고창군 심원면 복분자 작목회원 10여 명이 처음 사업 구상을 한 건 지난해 초였다. 고창 복분자가 유명세를 타자 전국 각지에서 유사제품이 쏟아져 정작 고창 복분자주는 설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고창 작목회원들은 기업과 손을 잡기로 했다. 최고 품질의 복분자를 생산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으나 경쟁력 있는 술 제조와 마케팅은 아무래도 기업이 맡는 게 효율적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업구상에 농민과 기업 모두 시큰둥했다. 국순당 측은 ‘농민들은 모였다가도 쉽게 흩어진다’ ‘최상급 제품만 납품한다지만 믿을 수 없다’ ‘국산품은 가격이 비싼 데다 가격 등락도 심하다’면서 의문을 제기했다. 이웃 농민들도 ‘기업과 함께하면 농민만 피해 본다’ ‘농업에 기업의 손길이 뻗치게 할 수는 없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끈질긴 설득과 농민·기업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불신은 서서히 걷혔다. 농민들은 품질 관리를 위한 국순당의 요구에 호응했다. 생소한 생산이력제도 받아들였다. 6월 15~25일에 딴 복분자만 술 제조용으로 납품해야 한다는 조건도 맞췄다. 6개월 후 이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농민은 420명에 달했다. 1인당 100만~5000만원의 출자금도 선뜻 내놨다. 공장은 6월부터 가동됐다.

◆농산 합작 새 모델 될까=이들의 실험에 회의적 시각도 있다. 이미 수십 개의 복분자주 회사가 난립해 있는 데다 중국산이나 저급 복분자로 만들어진 싸구려 복분자주도 시장에 마구 흘러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창의 농산 합작이 성공하면 이는 곧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파고를 넘을 새 돌파구를 여는 게 된다.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연구위원은 “인구 400만 명의 뉴질랜드가 세계적인 농산물 수출국이 된 건 농산물의 품질과 함께 세계적인 마케팅·유통망을 가졌기 때문”이라며 “농산 합작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면 한·미 FTA의 파고도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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