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삼봉의 최후, 그리고 대종손의 비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전라도(全羅道)는 원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첫 글자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지금은 전라도 하면 빛고을 광주(光州)를 생각하지만, 예로부터 전라지역의 중심은 천년목사골의 고도(古都) 나주였다. 노령(蘆嶺).서석(瑞石)의 기운이 뻗친 단중기위(端重奇偉)한 금성산(錦城山)을 진산으로 하고, 완사(浣紗)의 개울이 선녀의 소맷자락 굽이치듯 휘감아 영산강으로 회류하여 남해로 흐르고, 남쪽의 너른 벌은 청수돌올(淸秀突兀)한 영암의 월출산에 이르는 호남의 웅도(雄都) 나주!

이 나주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는 대형의 옹관고분이 다시면(多侍面)과 반남면(潘南面)에 밀집해 있다. 이 다시면의 한구석에 소재동(消災洞, 현 운봉리 백동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바로 이 소재동에서 조선 건국의 아버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귀양살이를 했던 것이다. 본시 경상북도 봉화 사람으로 공민왕 11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까지 특진하였던 그는, 시세를 파악지 못하고 친원반명(親元反明)의 고루한 정책에 매달리는 당대의 재상들과 불화를 일으킨다. 원의 사신을 접대하라는 이인임의 명령에 "그놈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겠다"라고 호통치고 그 길로 귀양길에 올랐다.

나주시 다시면 백동마을에 서 있는 도올의 신소재동기 팻말. 천편일률적 형식적 문화재 팻말과는 달리 매우 구체적인 내용과 의미를 전한다.

그는 다시면 소재동 거평부곡(居平部曲)에서 인정 어린 따사로운 부곡민들의 우정을 듬뿍 받기도 했고, 중앙벼슬아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의연한 촌로들로부터 날카로운 꾸지람도 많이 듣는다. 이 소재동 3년 생활에서 삼봉은 맹자의 민본사상에 기초한 건국의 사상적 기틀을 완성한다. 유배 3년의 리얼한 삶의 모습을 '소재동기'(消災洞記)라는 수필 속에 담았는데, 그것은 실로 고려 말 사회 모습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소중한 문헌이다.

고부 만석보를 터뜨리며 동학혁명의 기치를 올리게 만든 민중의 한(恨), 수세(水稅)! 그 수세를 혁파하는 농민운동으로 양명하여 젊은 나이에 나주시장이 된 뜻있는 사나이 신정훈(辛正勳)이 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다시면에 삼봉 귀양지 안내판을 세우려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논두렁에 선 게시판 글 하나를 읽고도 새 나라를 건국할 수 있는 인물이 또 나올 수도 있는 일! 암 도와주고 말고." 나는 '신소재동기'(新消災洞記)라는 문장을 써서 내려보냈다. 백동마을 어귀에 지금도 그 게시판은 외롭게 서 있다.

엊그제 나는 기막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봉화 정씨 대종손 정병무(鄭柄武, 67세) 선생 교통사고로 사망. 삼봉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대업의 설계를 완성했으나 결국 그 설계의 실천자이며 애제자 격인 이방원의 칼날에 이승을 뜨고 만다. 이런 시구를 남긴 채. "삼십 년 동안 근근이 쌓아올린 괴로운 공업, 송정에서 한 번 취하니 결국 공으로 돌아가는가?"(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 나 도올은 삼봉의 이 구절에 이렇게 화답했다. "삼봉선생이시여 이제 굴러가는 중생의 업보에 연연치 마소, 내 그대와 더불어 잔을 들어 세상의 티끌을 저 허공에 흩날리리."(勿要戀戀生輪業, 與君擧杯皆散空).

나는 삼봉을 생각할 때마다 정병무를 그렸다. 그의 장쾌한 풍도 속에 삼봉의 기품이 서려 있는 것을 항상 느꼈기 때문이다. 이방원의 칼날로 역모죄를 쓰고 고종 2년 복권되기까지 5세기의 세월을 평택 진위면 은산리에서 숨어 지내야 했던 봉화 정씨! 500년 전 소재동에서 삼봉이 동네사람들과 즐겨 마셨던 곡주를 재현해 만들어 놓았으니 같이 마시자고 청해서, 소설가 최인훈 선생과 함께 하룻밤을 거나하게 취했던 기억이 새로운데 이 웬 말인고!

상가에 이르고 보니 사연인즉 너무 처참했다. 대종손은 타종가 사당을 시찰하고 친구 초청으로 괴산에 내려갔다. 청천면 송면리 도로변 인도를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질주하던 자동차가 들이받아 10m나 허공으로 튕겨나가 거꾸로 떨어졌다는 것이다(7월 31일 밤 10시40분경). 희생자는 두 명이나 되었는데도 그 자동차는 뺑소니치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뺑소니 차량의 주인공은 청주교구 모 성당 주임신부.

"그리고 하는 말이, 졸려서 뭔가 쿵 한 것 같았는데 백미러 보니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갔어요 하더군요. 고해성사를 받는 성직자가 거짓말로 사람을 두 번 죽입니다그려. 세상 언론이 다 외면하고 성직자만 보호하려고 듭니다." 동생 병돈씨의 말이다. 아무도 없는 칠암흑 속에서 몸부림치며 생의 최후를 마감한 종손의 아픔을 생각하며 삼봉의 비장한 최후를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