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주먹으로 문제해결 하나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한 10년 전에 졸업과 동시에 결혼, 시댁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갔던 미선이가 초등학교 2학년짜리 딸을 데리고 세배를 왔다. 요새는 너도나도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외국에 가고 싶어 한다지만, 미선이는 그 반대의 경우다. 연로하신 시부모님이 노년을 한국에서 보내길 원해 남편이 이곳에 직장을 얻어 함께 돌아왔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딸 세영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말과 한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곳에서 학교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언어 문제는 없었지만 세영이가 한국 생활에서 겪은 소위 '문화 충격'은 꽤 심했다고 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세영이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혹시 반 친구들이 발음이 이상하다고 놀리는지, 선생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지 물어보았더니 세영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선생님이 무슨 질문을 하면 학생들이 모두 걸상에서 일어나다시피 서로 경쟁하면서 큰 목소리로 "저요, 저요 "를 외쳐대니 그게 무섭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조금만 크게 이야기를 해도 와서 입을 막는 세영이의 별명은 집에서 '꼬마 평화주의자'다.

세영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꽃병이나 인물뿐 아니라 나름대로 상상 속의 고래나 바퀴벌레를 그리곤 하면 미국 선생님들은 웃으면서 '재미있는' 그림을 그렸다고, 아주 창의적이라는 평을 하곤 했다. 그런데 한국의 선생님은 세영이가 2학년인데도 아직도 자꾸 '삐져나가게' 색칠을 한다고 매우 걱정된다는 듯이 이야기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님, 제가 생각해 보았는데요." 미선이가 말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삐져나가지 않기' 교육 같아요. 선을 그어 놓고 거기서 삐져나가는 사람은 왕따를 시키는 거요. 다수와 다른 행동을 하면 '이상하다'고 매도하거나 아예 상대를 하지 않거든요. 미국에서는 '짝짝이 양말 신고 학교 오기' 뭐 그런 숙제도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다름'을 인정하고 익숙해지는 교육을 시키려는 목적 같아요."

미선이의 말을 듣다 보니 어느 외국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나라 말에서 '다르다'와 '틀리다'가 간혹 동의어로 쓰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르다'(different)와 '틀리다'(wrong)는 엄연히 다른 뜻인데 '네 의견은 나와 다르다'의 뜻으로 '네 의견은 나와 틀리다'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다른' 것은 무조건 '틀리다'고 보는 견해,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시위문화가 발전하지 않았을까 한다고 나름대로 분석하는 것이었다.

'시위문화가 발전'이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물론 그것은 칭찬은 아니다. 지난해만 해도 걸핏하면 대규모 폭력시위가 끝없이 이어졌고, 통계에 따르면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가 1천명 이상 모이는 시위에만 한 해 동안 1백30회 이상 출동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재미있는 말 하나 할까요?" 미선이가 덧붙였다. "지난번 부안 시위 때인가요. 이번에는 분명히 평화적인 촛불 시위였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주먹을 쥐고 아래 위로 흔들며 함께 노래 불렀어요. 우리에게는 그게 눈에 익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세영이가 '엄마, 저 사람들은 왜 노래를 부르면서 주먹을 흔들어? 난 주먹이 싫어.' 하더라고요."

미국에 아직 집이 있다는 미선이는 간혹 세영이 때문에 돌아갈까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미국이라고 결코 문제 없는 사회가 아닐뿐더러 이산가족이 될 수 없어 새해에는 세영이가 좀더 이곳 생활에 적응해 주기를, 아니 무조건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 사회가 세영이의 평화주의에 조금은 적응해 주었으면 바란다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