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년 1회「미스 코리아」재불 사업가 강귀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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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리나라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지금부터 꼭 40년 전인 1953년 5월. 그해 7월27일 휴전이 성립되고 8월15일정부가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옮겼으니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던 암울한 혼란기였다.
이미 폐간된 한 신문사의 주최로 항도 부산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최초의 미스코리아로 뽑힌 미인은 강귀희씨(58). 당시 화제의 주인공이 됐던 강씨가 40년이 지난 지금은 프랑스 파리에서 어엿한 사업가로 변신해 있다.
그녀가 요즘 주로 하고 있는 일은 프랑스 등 유럽 기업과 우리나라 기업간의 기술제휴를 주선하고 국내 건설업체들의 중장비 도입을 알선하는 일. 이미 15년 전부터 프랑스 최대의 중장비 메이커인 르노아포클랭의 독점 에이전트로 활동하면서 D사·H사 등 국내 유명 건설업체들에 중동 건설사업에 필요한 중장비 도입을 알선했고 방수제 생산업체인 한국 벤토나이트를 비롯, 여러 건의 합작사업과 기술제휴를 성사시켰다.
강씨는 또 파리에 있는 최고급 한식 레스토랑인「르 세울」(세울은 서울의 불어식 발음) 을 부업으로 경영하고 있다. 올해로 개업 20년째인 르 세울은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 궁)바로 곁에 위치해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을 비롯, 프랑스 정계의 유력인사들을 단골로 두고 있다. 이미 다섯 차례나 이 식당을 찾은 바 있는 미테탕 대통령의 단골메뉴는 생선회라는 것이 강씨의 귀띔.
고향인 대구에서 경북고여를 나온 그녀가 미스코리아로 선발된 것은 숙대 영문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 여덟살 때. 전쟁을 피해 일시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겨온 다른 대학들처럼 천막교사에서 가마니를 깔고 공부하던 시절이었다.『선배언니가 대회에 나간다고 해 호기심에 구경하러 갔었지요. 당시 부산시청 강당에서 예선을 했는데 구경꾼이 어찌나 많던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 서 있었어요.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대회관계자라는 사람들이 다가와 심사위원들끼리 다 얘기가 돼 있으니 절더러 대회에 나가란 거예요. 전혀 생각도 않았다가 떼밀리다시피 출전하게 된 겁니다.』
당시 본선은 비공개로 진행됐다는 것이 강씨의 회고. 예선이 끝난 며칠 뒤 수영복 심사로 최종선발을 하게 돼 있었는데 몰려든 인파 때문에 대회장이 수라장으로 돌변, 행사를 취소하고 나중에 심사위원과 10명의 본선 진출자들만 따로 모여 1, 2, 3등을 뽑았다는 것.
『후회도 참 많이 했어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만난 것처럼 몰려들어 바깥 출입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학교에 가도 학장실에서 수시로 불러들이는 바람에 공부 또한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고요.』
돈 있고 권력 가진 사람들로부터「화초며느리」로 삼겠다는 제의가 학장실을 통해 빗발쳤다는 얘기다.
강씨가 파리에 정착한 것은 지난 72년. 연애로 결혼한 남편과 헤어진 뒤 혈혈단신 월남으로 건너가 군부대를 상대로 텔리타이프 수리사업 등을 해 꽤 돈을 모은 다음이었다.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각오로 파리에 온 뒤 한때 의상디자인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식당을 내면서부터 사업가로 변신, 보통 미스코리아 출신들과는 다른 독특한 인생을 살고 있다.
『헬밋 쓰고 공장 방문하는 것이 취미』라고 말할 만큼 지금은 맹렬 사업가로 변신한 강씨는 파리 근교에 있는 대지 3천평짜리 저택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단 둘이 살고 있다. 【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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