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푸는역시] 일제 식민지 본격화 … 의병이 된 군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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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러일전쟁(1905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방적으로 을사늑약을 발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통감부를 설치하며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면서 내정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했다(1907년). 국가의 마지막 보루이자 버팀목인 군대가 해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변해버렸다.

 군대 해산 직전 대한제국 군대는 일제의 지배를 반대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1907년 7월 19일 고종 퇴위를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벌어졌고, 당시 제1연대 제3대대 소속 무장 군인 100여명이 병영을 이탈한 후 시위 군중과 함께 종로파출소를 습격해 다수 일본 경찰과 10여 명의 일본 상인을 살상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일제는 곧바로 일본군 제12여단 전투부대를 대구·평양을 위시한 전국 주요 지구에, 제13사단을 서울로 배치하는 등 7월 31일까지 병력 이동을 완료했다. 7월 31일 밤엔 드디어 군대 해산에 대한 황제의 칙령을 반포하게 하였다.

 다음 날인 8월 1일 오전 8시 동대문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이 열렸다. 이 때 사병들에게는 훈련원에서 도수훈련(徒手訓練)을 한다며 맨손으로 모이게 했다. 지방의 진위대(질서유지와 변경수비를 목적으로 1895년 설치된 근대적 지방군대)도 서울에서와 비슷한 기만적 방법으로 소집됐으며, 9월 3일 북청진위대를 끝으로 모두 해산됐다.

 군대가 강제 해산된 첫 날부터 완강한 저항이 잇따랐다.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이 도화선이 되어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남대문과 창의문 일대에서 봉기했고, 지방 진위대에서도 항일 봉기가 지속됐다.

 군대 해산은 우리의 역부족을 한탄하게 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의병 전쟁이 다른 양상으로 확대 전개된 점도 주목해야 한다. 전투 또는 훈련 경험이 있는 군인들이 의병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항일 무장 투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최영묵<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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