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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의 ‘과거’ 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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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화제다. 한국 영화로는 드물게 100억원대의 제작비를 들여 만들었다. 상업 영화의 소재로는 다소 무겁지만 관객의 발길은 제법 몰리고 있다.

 영화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그리고 있다. 법대생을 꿈꾸는 동생(진우)을 뒷바라지하는 택시기사 민우는 어느 날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무고한 시민들이 진압군에게 폭행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은 퇴역 장교 흥수를 중심으로 시민군을 조직해 진압군과 사투를 벌여 나간다.

 영화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들이다. 뜻하지 않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서민들의 얘기다.

 한때 ‘5·18’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시절이 있었다.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들이 좌익·용공으로 매도되던 때였다. 그런 사건이 재평가를 거쳐 이제는 대중영화의 소재가 됐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7년이 흘렀다. 잊을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고 그 위엔 새 살도 돋아났으리라. 무엇보다 영화 속 주인공 ‘광주의 보통 사람들’은 민주화의 주력이 됐다. 직선제를 쟁취했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만들어 냈다. 광주의 뒷받침으로 권력을 잡은 정치세력이 지금의 범여권이다.

 범여권이 영화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개봉된 지 일주일이 갓 넘었는데 내로라하는 범여권의 대선 주자들과 중요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 영화를 봤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해찬·한명숙 전 국무총리,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등등.

 그 속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화려한 휴가’가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해 연말 대선이 민주세력 계승자 대(對) 반민주세력 계승자의 대결구도가 됐으면 하는 기대가 담겨 있다. 영화에서 그려진 시민군과 진압군 간의 전선(戰線)이 현실에서 재현되면 해볼 만한 게임이 되지 않겠느냐는 바람이다.

 오래전부터 범여권은 시민군=범여권, 진압군=한나라당으로 설정하고 주문(呪文) 외듯 스스로를 민주평화개혁세력이라고 자처해 왔다. ‘민주’, ‘평화’, ‘개혁’ 이미지를 선점해 한나라당을 ‘독재’ ‘군사’ ‘수구’세력의 후예로 낙인 찍으려 한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이런 설정과 논리는 어느 정도 먹혀 들었다. 그러니 민주-반민주 구도에서 얻은 과실(果實)의 향수와 환상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1년 넘게 끌어오고 있는 대통합 논의란 것도 따지고 보면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다시 한번 만들어보자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할지는 미지수다. 30년 전의 낡은 필름을 다시 돌리며 “군사독재세력의 후예들에게 정권을 다시 맡기겠느냐”고 읍소하면 관객들이 또 한번 감동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새살이 돋아나고 있는 상처만큼이나 국민들의 의식은 성숙되고 있다. 국민은 80년 광주의 희생을 발판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성숙함을 보여 줬다. 그런데 정치권만 ‘과거’의 이해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려면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를 재탕 삼탕으로 강조할 일이 아니라 어떤 비전과 능력을 갖고 있느냐를 보여 줘야 한다.

 범여권은 민주와 평화, 그리고 개혁을 구두선(口頭禪)처럼 외우기보다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실제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먼저 내보여야 한다. 그래서 국민이 그들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게 나라의 미래를 맡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책임 있고 성숙한 자세다.

이정민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