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한인 '풀뿌리 운동' 일본 필사적 로비 뚫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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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원의 결의안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고 성 노예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미 의회가 공식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결의안은 그간 이를 부인해 온 일본 정부에 사실로 인정하고 분명히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국제사회는 이제 일본 정부가 결의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주목하고 있다.

위안부 결의안은 1997년 윌리엄 리핀스키(민주) 당시 하원의원이 처음 발의한 이래 하원에서 여섯 번이나 추진됐지만 미 의원들의 무관심과 일본의 강력한 로비 때문에 채택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일본계 3세인 마이크 혼다(민주) 의원이 "위안부 생존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돕자"며 적극 나섰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해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한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 지도부도 혼다 의원을 지지했다.

일본이 3개 로비.홍보 회사를 동원해 필사적으로 저지 로비를 벌였지만 "우리는 책임 없다"는 식의 태도는 역효과만 냈다. 반면 재미 한인들은 청원서를 보내는 등 적극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하원 의원들의 마음을 샀다.

◆ 펠로시 의장 "매우 기쁘다"=펠로시 의장은 결의안 가결 후 혼다 의원이 개최한 기념 리셉션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잘 안다"며 "결의안이 채택돼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 등을 격려하면서 "주변에서 9월이나 내년께 결의안을 처리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해 처리를 서둘렀다"고 밝혔다.

결의안은 상정된 지 35분 만에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표결에 앞서 진행된 찬반 토론에서 찬성 발언만 나오자 펠로시 의장을 대신한 임시 의장은 구두로 의원들의 찬반 의사를 물은 뒤 반대 의견이 없자 그대로 통과를 선언했다. 랜토스 위원장은 기명 표결을 검토했으나 반대 목소리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자 구두 표결로 바꿨다고 의회 관계자는 전했다.

◆ 풀뿌리 운동의 승리="한국인들의 강력한 풀뿌리 운동이 결의안 채택의 원동력이 됐다"는 혼다 의원의 평가처럼 재미 한인들은 똘똘 뭉쳤다. 정신대대책위원회(위원장 서옥자)와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소장 김동석) 등 한인 단체들은 하원 의원들에게 결의안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 보내기 운동을 집중 전개했다. 펠로시 의장이 "청원서를 그만 보내도 된다"고 당부할 정도로 이들은 열심히 뛰었다.

한인들은 다섯 차례의 로비 데이를 활용해 하원 의원들과 보좌진을 직접 접촉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풀뿌리 운동이 체계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용수.김군자 할머니와 네덜란드계 호주인 얀 러프 오헤른 할머니가 2월 위안부 청문회에서 한 증언은 미 의회와 언론에 큰 충격을 줬다. 세 할머니를 증언대에 서도록 만든 건 한국과 미국의 한인단체였다.

◆ 오만한 일본의 자충수=결의안 가결을 지켜본 미 의회 관계자는 "일본 정부와 의회의 뻔뻔한 태도가 미국에선 결의안이 왜 필요한지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3월 1일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사실을 부인하며 "책임이 없다"고 말해 미국의 비난을 샀다. 그는 4월 26일 워싱턴에서 펠로시 하원 의장 등 하원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의 느낌(sense of apology)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하원 지도부는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6월 14일 워싱턴 포스트엔 "위안부 동원에 강압이 없었고, 위안부는 대접을 잘 받았다. 미국도 일본을 점령했을 때 위안소 설치를 요청하지 않았느냐"는 내용의 전면광고가 실렸다. 일본 의원 40여 명이 낸 이 광고는 미 의회와 언론의 분노를 촉발했다. 주미 일본 대사관이 급히 "이 광고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 다르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혼다 의원은 "그 광고가 역효과를 냈다"고 말했다.

워싱턴=이상일.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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