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5·18」 어떻게 일어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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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군부서 병력동원 권력장악 12·12/김대중씨 체포에 시민군 저항 5·18
79년의 10·26과 80년의 5·17,그리고 5·18로 이어지는 정변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한 장면들이었다.
79년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후 터진 12·12는 전두환보안사령관의 신군부측이 정승화육참총장을 체포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며,80년 5·18은 신군부의 5·17계엄확대조치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저항이다. 12·12와 5·17이 신군부의 단계적 대권장악 시나리오라면 5·18은 이에 항의하는 민중의 궐기로 기록되고 있다.
유신의 몰락으로 권력공백에 따른 정치장래의 불확실속에서 전 보안사령관은 12월12일 저녁 정승화계엄사령관을 연행·체포하면서 군사 모반이 시작된다. 당시 김재규의 박 대통령 시해 범행을 조사한 합동수사본부장인 전 사령관은 10·26의 완전한 진상규명을 위해 정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가 12·12라고 주장해 왔다.
당초 전 사령관은 서울 한남동 총장공관에서 정 총장을 연행,경복궁내 수경사 30경비단에 모인 장성들앞에서 계엄사령관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시나리오를 짰다.
30경비단에는 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황영시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 등 전 사령관의 군선배와 노태우9사단장,백운택71방위사단장,박준병20사단장,박희도1공수·장기오5공수·최세창3공수여단장,그리고 장세동30경비단장·김진영33경비단장이 집결했다.
전 사령관의 거사는 정 총장 연행임부를 맡은 우경윤육본범죄수사단장·허삼수보안사인사처장이 끌고간 합수본부병력과 총장공관경비병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하면서 차질이 빚어진다. 최규하대통령이 노재현국방장관의 확인후 재가를 한다고 버틴것도 전 사령관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총격전 발생후 육본측은 군출동준비태세를 발령하면서 전 사령관측과 무력대치에 들어간다. 이때 경복궁 합수본부측의 모반을 진압하는 중심은 장태완수경사령관과 장병주특전사령관이었다. 그러나 진압군출동 움직임은 수경사의 실병력이 전사령관측에 의해 넘어가고 통신조직을 장악한 전 사령관측의 설득으로 군수뇌부·수도권부대 젊은 참모들이 흔들리면서 대세가 결정났다.
12·12로 군권을 장악한 전 사령관측은 80년 서울의 봄속에서 권력을 향해 조금씩 움직여왔으며 5·17은 본격적 권력질주였다. 계엄확대 조치속에 3김시대의 한인물인 김대중씨를 체포해 광주시민들을 통분케 했다.
5월17일 자정을 전후해 광주에 진주한 7공수여단의 무차별 시위진압은 시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 신군부측은 공수부대를 증강투입하고,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해 저항했다. 5월27일 시위대가 집견한 광주도청이 무력 진압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12·12가 사실상의 쿠테다였다면 5·18은 쿠테타세력에 저항한 민중의 궐기였다.<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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