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동료 석방 끝까지 안 되면 돈 요구할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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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봉사단원 23명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된 지 29일로 11일째. 인질 22명의 석방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분쟁지역의 인질사건을 연구하고 있는 미국 웰링 제수이트 대학 범죄학과 윤민우(35·사진) 교수가 이번 사건을 분석한다. 윤 교수는 샘휴스턴주립대에서 인질 테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편집자> 탈레반은 25일 배형규(42) 목사를 살해했다. 탈레반 내부 강ㆍ온파 대립이나 일원화된 지휘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돌발적 사건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러나 과거 인질 사건을 분석할 때 '예정된 수순'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슬람권 무장세력은 다양한 요구조건을 내놓아 내부에 이견이 있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협상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돈을 노려 민간인을 납치하는 나이지리아ㆍ소말리아 지역의 납치범과 달리 정치적ㆍ종교적 명분이 강한 탈레반 같은 집단이 벌인 인질 사건은 종종 희생자가 발생한다. 1985년 10월 지중해에서 발생한 이탈리아 국적의 여객선 아킬레라우로호 납치 사건이 그 예다. 팔레스타인 해방전선 소속 테러리스트들은 180명의 승객과 331명의 승무원을 인질로 잡고,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50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탈리아 정부 당국과의 협상 도중 테러범들은 미국 국적의 유대인 한 명을 살해했다. 이번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탈레반은 돈을 노린 범죄 조직으로 비춰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인질을 처형했을 가능성이 높다. 협상 진척 정도에 따라 인질을 골라 살해함으로써 대의명분과 강경한 의지를 알리고 아울러 협상 상대방을 압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살해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요구조건이 끝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돈을 받아내려 할 것인데 희생자가 많으면 협상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聖戰 내세우기 위해 살해 탈레반은 왜 배 목사를 희생양으로 삼았을까? 성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상징적인 인물로 배 목사를 선택했을 수 있다. 또 건강상태가 나빠 살해했을 가능성도 높다. 아프가니스탄처럼 험준한 산악지형을 따라 납치범들이 수시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건강이 나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인질은 기동력을 떨어뜨린다. 배 목사는 평소 지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탈리아 선박 납치 사건 때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은 유대인 가운데 장애가 있는 사람을 살해했다. 또 납치범들은 논쟁을 벌이려는 등 귀찮게 하는 인질을 먼저 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런던 신드롬’이다. 1979년 팔레비 정권 붕괴 후 호메이니가 이란을 장악하자 이듬해 5월 호메이니 반대 세력이 런던 주재 이란 대사관에 침입해 24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이들은 이란 정부가 억류한 90여 명의 동료를 석방하라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그런데 열렬한 호메이니 추종자인 대사관 직원 한 명이 테러리스트들과 논쟁을 벌인 직후 살해됐다. 인솔 책임자인 배 목사가 납치세력을 설득하다 변을 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장기간 억류 쉽지 않아

탈레반은 25일 인질 8명을 석방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일부를 석방해도 23명을 억류하고 있을 때와 협상력에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탈레반은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단계적으로 인질을 석방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1~2개월 안에 대부분의 인질을 석방할 가능성이 높다. 아프간 정부군ㆍ나토군이 납치 세력의 근거지를 봉쇄한 상태에서 장기간 억류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탈레반은 물자 보급이 어려운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다. 납치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콜롬비아·필리핀에서는 테러범들이 추적이 어려운 정글에 은신처를 마련하는 데다 자급자족을 함으로써 길게는 5년까지 인질 사건을 끄는 것과 비교된다. 2002년 4월 납치된 11명의 콜롬비아 정치인이 반군의 정글 캠프에 억류돼 있다 지난 6월 콜롬비아 정부군의 구출작전 과정에서 피살됐다. 여러 조직이 역할 분담 과거 아프간에서 폭탄 테러는 자주 있었으나 민간인 납치사건은 많지 않았다. 옛 소련의 침략에 맞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사’로서의 전통을 갖고 있는 탈레반은 민간인 납치를 불명예로 여긴다. 하지만 미군의 대규모 토벌로 조직이 와해되면서 정규 작전이 힘들게 됐다. 여기에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납치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이라크에서의 사례를 통해 배웠다. 그러나 정작 2004년 김선일씨를 비롯한 외국인을 납치해 살해한 이라크의 알카에다 내 테러 조직은 잔인성 때문에 입지가 좁아졌다. 신세대 탈레반은 원로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슈라(부족 원로회의)’의 말도 과거처럼 잘 먹혀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슈라를 통해 탈레반 무장세력에게 지속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최근 테러조직은 프랜차이즈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보스-중간 관리자-행동대원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벗어나 군소 조직이 독립적·수평적으로 움직인다. 탈레반도 모두 탈레반이라는 깃발을 들고 다니지만 납치·인질 관리ㆍ협상 등 역할을 나눠 맡는다. 납치 세력과의 협상이 더뎌지는 이유다. 정리=고성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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