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티시 골프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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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16면

AP=연합뉴스

성 베드로 성당이나, 가우디 성당 같은 화려한 성당이 들어섰다고 해서 크리스천이 로마나 바르셀로나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아니다. 거칠고 험해도 그들의 성지는 예루살렘일 뿐이다.

北海의 바람과 맞서는 그 거친 세계

골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독실한 골퍼들은 융단 같은 페어웨이를 자랑하는 오거스타 내셔널이나 태평양 절경에 그림처럼 선 페블비치보다 황량한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를 최고로 친다. 골프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영국 사람들은 오죽할까. 영국인들의 링크스 코스와 디 오픈(The Open Championship:브리티시 오픈)에 대한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종교적 신념과 다르지 않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반도에 있는 페블비치가 링크스라는 말을 쓰는데 대해 영국인들은 “말도 안 된다”고 비웃는다. 링크스는 단순히 해변에 있는 골프장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링크스(links)와 시사이드(sea side) 골프장을 엄격히 구분한다. 영국인들은 바닷 바람에 실려온 고운 모래가 수만 년 동안 쌓여 이뤄진 모래 둔덕에 생긴 코스라야 링크스로 본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골프 원리주의자들은 비슷한 조건이라도 북해에서 부는 바람이 아닌 곳, 즉 영국 북부와 아일랜드 이외 지역에는 링크스가 없다고 단언한다.

링크스는 음습하다. 날 궂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바닷가에 생긴 모래 둔덕은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한여름에도 털모자를 써야 할 정도로 추울 때가 많아 야외활동에 적절하지 않다. 특히 600년 된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는 그린과 페어웨이를 옆 홀과 함께 써 불편하다. 러프에 들어간 공은 찾을 생각도 말아야 한다. 골프 여행가인 조주청씨는 “프로라면 몰라도 아마추어들이 골프를 즐기기에 적절한 코스는 아니다. 다시 거기서 치라고 해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링크스는 성지이며 디 오픈이 가장 본질적인 골프의 기량 테스트에 가장 적절하다”고 말했다.

링크스는 염분이 많아 농사는 짓지 못하고 잔디와 가시 금작화 관목 등만 자란다. 그런데 영국인들은 이런 불모지에 골프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이 성지에 워터해저드나 카트길 같은 인공적인 시설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나무와 꽃을 심는 등의 조경 작업도 죄악이라고 여긴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는 6세기 동안 이 코스에서 골프게임이 열렸지만, 한 번도 코스에 인공적인 디자인이 가미된 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링크스에서만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골프 대회인 디 오픈이 열린다. 디 오픈을 개최한 코스는 총 13개이며 현재 이중 9개가 돌아가면서 대회를 연다. 골프의 발상지이자 영국 링크스의 본산인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는 5년마다, 다른 곳은 부정기적으로 대회를 연다.

공식적으로 브리티시 오픈이라는 말은 없다. 1860년 시작된 이 대회는 이듬해 아마추어에게도 문호를 열면서 디 오픈이라는 이름이 됐다. 당시 오픈 대회는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앞에 무슨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이후 여러 골프대회가 오픈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오픈은 보통명사처럼 돼버렸고 미국 사람들은 US 오픈과 구분하기 위해 디 오픈에 브리티시라는 말을 붙였다.

영국인들은 “이런 논리라면 마스터스도 아메리칸 마스터스라고 해야 한다”고 발끈한다. 요즘은 미국에서도 브리티시라는 말을 빼고 다시 디 오픈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국내에서는 최고의 골프 대회를 마스터스라고 여기는 분위기다. 다른 곳의 사정은 다르다. 유럽에서 최고의 골프 대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디 오픈이다. 미국의 골프 라이터 설문에서도 최고의 골프 대회를 디 오픈이라고 꼽은 수가 절반에 가까웠다. 미국에서도 마스터스는 내셔널 타이틀인 US 오픈보다 못한 3등 대회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타이거 우즈도 그렇다. 19세이던 1995년 악마의 골프장이라 불렸던 카누스티에서 열린 스코티시 오픈에 참가했다가 그는 링크스에 반했고 디 오픈을 사랑하게 됐다.
“링크스는 창의성을 가지게 한다. 미국 코스는 러프 길이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다 똑같은 골프장일 뿐이다. 공중전(장타)에 능하고 똑같은 샷만 쳐대는 선수가 미국에서는 상위권에 오를 수 있지만 링크스에서는 아니다. 바람과 땅의 굴곡을 잘 이용하고 항상 다른 샷을 쳐야 한다. 디 오픈에선 그린 밖 50야드에서 퍼팅을 해야 할 때도 있고 135야드에서 5번 아이언을 쳐야 할 때도 있다.”

디 오픈의 특성 중 하나는 자연스러움이다. 언더파 우승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페어웨이를 좁히고 그린을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다져 선수들로부터 “우리 망신시키려 만든 대회”라는 불평을 받는 US 오픈과 달리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긴다.

날씨가 좋았던 2000년 디 오픈에서 타이거 우즈는 19언더파로 우승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사정이 다르다. 북해에서 부는 무시무시한 비바람은 코스 구석구석에 처박혀 있던 항아리 벙커와 러프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우즈는 악천후 속에 치러진 2002년 디 오픈 3라운드에서 81타를 쳤다. 그가 17번 홀에서 버디 하나를 잡아내고 태어나 첫 버디를 잡은 선수처럼 기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변화무쌍한 링크스에서 성장한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 골퍼들은 강인하고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 카누스티 18번 홀에서 두 번이나 개울에 공을 빠뜨리고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우승한 파드리그 해링턴(아일랜드)이 강인함의 상징이다. 미술을 전공한 루크 도널드(잉글랜드)는 그린 주위에서 그림처럼 다양한 샷을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출신 골퍼들의 또 다른 특징은 패션이 화려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점잖은 골프에서 보기 어려웠던 분홍색이나 노란색, 심지어 영국 유니언 잭으로 바지를 만들어 입고 나온다.

보수적일 것 같은 영국 선수들이 미국 선수들보다 더 패셔너블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유럽의 패션감각이 미국보다 앞서 있기도 하지만 일부는 이 현상을 자신감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골프 종주국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그들을 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 선수들은 골프의 전통이 없기 때문에 더욱 전통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올해로 147년째(136회)를 맞은 디 오픈은 23일(한국시간) 해링턴의 극적인 우승으로 끝났다. 이제 여자 브리티시 오픈이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8월 2일 개막한다. 600년 역사의 골프의 발상지인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여자 대회가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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