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적자 일본 항만 경영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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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국경 없는 경제를 제창해온 필자는 최근 10년간 동아시아 국가들의 상호 경제교류를 연구해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해 경제권이 급속히 떠오르고 있다. 이는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무역권을 형성했던 중세 유럽의 한자동맹과 유사하다. 그 중심은 부산이다. 한국 사람들은 부산을 단순한 수출항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부산은 동아시아 주요 거점을 연계하는 이상적인 컨테이너 항이다.

▶ 오마이 겐이치

한국 기업들은 생산 거점을 국내에서 서해 연안의 톈진·옌타이·칭다오·상하이·다롄 등 중국 관세특구(FTZ)로 많이 옮겼다. 한국 경제의 공동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업 경쟁력 향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설비나 부품을 일본에 의존하는 전자기기 분야에서는 부산을 거쳐 손쉽게 중국 공장에 물품을 수송할 수 있다.

중국에서 조립된 제품들은 400~600개의 컨테이너를 실은 피더선(feeder·근거리 운항 중소형 선박) 편으로 부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선 처음으로 한국에서 해외로 수출하는 절차를 밟은 뒤 북미 혹은 유럽으로 향하는 메가캐리어(mega carrier)에 몸을 싣는다.

일본 항구들 갈수록 힘 잃어가

이들 메가캐리어에는 4000~6000개 정도의 컨테이너가 실린다. 서해 연안에도 최근 근대적인 컨테이너 선적항들이 많이 생겼지만, 부산은 이미 연간 1200만TEU의 물동량을 취급하는 세계 5위의 컨테이너 항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비해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일본 항구들은 어떤가. 도쿄(東京)가 382만TEU, 요코하마(橫浜)가 287만TEU로 부산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부산은 관심을 중국 연안에 집중하고 있어 경쟁력을 잃은 일본 항구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특히 남쪽으로 200km 떨어진 후쿠오카(福岡)와 기타큐슈(北九州)의 신항은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이 각각 80만TEU와 2만5000TEU에 불과해 부산항엔 별로 매력적인 상대가 아닐 수 있다. 이들 물동량을 더해봐야 부산항의 취급물량 10% 정도밖에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최근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 산업이 잇따라 공장을 세우고 있는 기타큐슈는 아시아 유수의 거점이 되고 있다. 렉서스 등도 이곳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규슈 지역은 또 일본의 실리콘 아일랜드로서 전자산업에도 강하다. 그런데도 주위에 경쟁력 있는 항구가 없어 제품들이 고베 등으로 옮겨져 수출 길에 오르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타큐슈 신항은 출범 3년째부터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터미널 회사 직원 25명을 8명까지 줄이면서 재건의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항만영업부까지 인력을 삭감해 앞으로 새로운 주문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회사는 싱가포르의 우수한 항만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PSA사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 회사의 자본비율은 34%다. 그러나 기타큐슈의 임원들이 낙하산 자리를 확보하려 하고, 일본 국토교통성의 지나친 규제 등으로 완전히 의욕을 잃은 상태다.

부산이 홍콩 허치슨사에 자성대의 운영을 맡긴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나는 일본이 기타큐슈나 후쿠오카의 새 항구를 한국 기업에 매각해 운영을 일임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 부산항은 서해 경제권에서 허브 역할을 할 것이다.

부산에는 앞서 언급한 허치슨뿐 아니라 신선대를 운영하는 부산동, 감만의 허치슨이나 한진 등의 운영공동체, 우암의 우암 컨테이터, 감천의 한진, 신감만의 동부 등 경험이 많은 기업 5~6개사가 있다. 여기에 지금 건설 중인 부산의 새 항구를 더하면 앞으로 규슈보다 북쪽에 위치한 일본의 항만들은 경쟁력을 잃게 된다. 화물이 있어도 이용할 항구가 없는 상황을 한국의 기업들이 절호의 사업 기회로 보느냐가 문제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이는 일본 항구사업에 뛰어들어 화물을 가로챈다는 것으로,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또 공공시설인 항만을 매수하는 것 역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본의 납세자들은 기타큐슈항, 후쿠오카항 모두 더 이상 적자를 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을 끼고 있는 서해에서 부산은 허브 항만이며, 다른 작은 항구들은 로컬항의 역할을 하는 것이 맞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내 무역규모는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에 뒤지지 않는다. 과거에는 각국이 독자적으로 생산에서 수출까지 다 맡았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기업이 일본에서 기계나 부품을 중국에 가져다가 생산, 이를 부산항을 통해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일본이나 대만 기업도 중국 각지에서 생산한 것을 상하이·가오슝·홍콩 등 가장 편리한 항구를 거쳐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정치적 공통점을 갖고 있고, 공통 화폐를 갖고 있는 EU에서도 역내 무역량은 전체의 60%에 불과하다. 미국이 야심 차게 추진해온 NAFTA도 역내 무역 비율은 30% 수준이다. 그런데도 정치적 연대는 물론 공통 화폐도 없는 동아시아의 역내 무역량은 55%에 이른다. 즉, EU와 비슷한 경제의 상호의존적 상황이 자연히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고 동아시아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은 각각의 영토 문제와 역사 문제를 안고 있다. 대만과 중국은 여전히 사상적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시대착오적인 정치인과, 새로운 경제에 무지한 언론인들이 만들어낸 세계관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적으로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이제 이 지역에서는 일본의 부품 및 기계산업, 중국의 노동시장, 대만의 경영인재 등 주변국들의 상황을 간파한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게 됐다.

아이팟은 동아시아 드림팀의 합작품

발매 2년 동안 1억 대를 판매한 애플의 아이팟은 동아시아 드림팀의 합작품이다. 아이디어는 애플이 제공했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MPU) 시스템은 실리콘밸리의 인도 업체 포털 플레이어,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와 플래시메모리는 도시바와 삼성, 본체 마무리는 일본의 고바야시켄교, 소형 모터는 니혼산교, 자기헤드는 TDK가 맡았다. 전체 조립은 대만 기업인 훙푸진 정밀공업(FOXCON)이 담당했다.

만약 애플이 미국업체들끼리 아이팟을 만들었다면 크기와 무게가 지금의 10배는 됐을 것이며, 2년간 1억 대 판매라는 기록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세계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생산의 배후지를 갖고 있으며,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가들이 부러워할 만한 훌륭한 기업을 배출하고 있다. 더욱이 이런 기업들은 정치인과 언론의 참견을 무시하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기업 간 합종연횡을 하며 지역의 대번영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한국, 일본, 대만 모두 먼 미래에는 중국에 흡수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윈-윈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연구에서는 동아시아(대만 포함) 4개국은 제각각 독특한 강점을 갖고 있으며, 상호 보완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앞서, 기타큐슈의 항만을 부산이 매수해 경영해야 한다는 나의 발상은 이런 서해 경제권, 혹은 오랜 세월 필자가 제창해온 국경 없는 경제의 틀에서 나온 것이다. 부산은 규슈 북부 지역 산업의 물류를 장악할 수 있고, 일본 기업은 부산을 이용함으로써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과거 페리가 없었던 시절에도 한국과 일본은 대한해협을 넘어 활발한 교역을 펼쳤다. 지금은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 쾌속선으로 2시간 55분 걸린다. 역내 국가들이 국경을 초월해 상호 연계를 강화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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