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진정 부른 부주석 김동규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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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정일 후계체제가 순탄하게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74∼78년간 지도층내부의 인사변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이무렵 김동규(국가부주석), 류장식(당정치위원회 후보위원·비서), 김중린(당비서), 이용무(군 총정치국장), 김철만(제1부총참모장), 김정현(인민무력부 부부장), 박수동(당조직부장), 한전수(정치위원·비서) 등이 모습을 보이지 않거나 일시 실각했다.
이들중 현재 당고위직에 복귀한 사람도 있다. 김중린은 당비서, 김철만은 정치국 후보위원, 김무현은 당군사위원, 박수동은 농근맹위원장 자리에 있고 한전수는 고혈압·당뇨로 78년 9월20일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 후계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실각한 경우는 아니었고 일정기간 지난뒤 복귀했다.

<당고위직 복귀도>
그러나 77년 10월 전후 김동규·류장식·이용무·장정환(인민무력부 부부장)등은 권력무대에서 사라졌다. 그해 4월26일 최고인민회의 5기 7차회의주석단에 얼굴을 내민 김동규·이용무가 같은해 12월15일의 6기1차회의주석단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지경수(당검열위원장·전호위사령부 부사령관), 지병학(인민무력부 부부장)이 76년 8월과 77년 2월 각각 사망, 권력투쟁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무렵 권력투쟁이라면 역시 김정일 후계체제를 둘러싼 갈등이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76년 6월초 열린 정치위원회 회의석상에서 국가부주석 김동규가 김정일의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고 나선게 「화근」이라고 증언한다. 간부임명과 해임절차를 규정한 「간부사업지도서」문제를 토의할 때였다. 이 관리에 따르면 김동규는 김정일의 ◆간부정책 ◆계급정책 ▲후계체제 확립과정에 비판을 집중했다
김동규는 『혁명열사 가족만 지나치게 내세우지 말라. 노동계급 가족의 불만이 크다』며 빨찌산 자제들에 대한 특별대우를 비판하고 「노동계급 우선」을 주장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항일열사 가족들을 우대하면서 이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제멋대로 행동하고 당규율·질서를 무시한데 대한 반발이었다.

<오진우 맞불작전>
김동규는 아울러 노간부에게 「노쇠」딱지를 붙여 일선에서 후퇴시키고 후계체제를 받쳐줄 청년간부를 대거 등용한 「간부청년화」정책에도 비판했다는 것이다.
회의에서는 오진우가 김동규의 비판에 반발, 논쟁이 불붙었다고 한다. 빨찌산원로 김일?최신도 오의 반발에 가세했다. 김일성은 논란을 지켜본 뒤 『「노쇠」딱지 붙이기, 당간부대열의 청년화에는 오류가 있다며 시정을 지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탁제가 있으면 그때그때 처리해야지 입다물고 있다가 뒤늦게 큰일난 듯 떠드는 것도 문제』라며 김동규의 「문제발언」을 겨냥했다고 한다. 김동규는 다음으로 김정일의 계급정책을 문제삼았다. 김정일은 당비서가 된 73년 9월무렵에는 대중신임을 의식,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시절 좌경으로 흐른 계급정책을 다소 완화시켰다고 한다. 그러다가 75년 무렵 유일지도체계 확립과정에서 다시 계급정책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70년대 중반 국가보위부(73년 5월출범)가 계급정책 강화의 전위대로 맹위를 떨쳤다.
이 과정에서 월남자가족·복잡계층 남한출신들이 소외당한데 대해 김동규는 『그들과의 단결을 위해 계급정책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부정책·계급정책에 대한 비판이 그의 숙청을 이끈건 아니었다. 시정조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
김동규가 숙청된 진짜 사연은 비판 끝대목에 『후계자부각을 너무 서두른다』고 문제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분위기상 가위 폭탄선언이었다.
김동규는 후계자결정은 인정하면서도 『김정일 치켜세우기에 너무 서둘러선 곤란하다』며 인민들이 납득할 수 있게 시간을 두고 교양을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후계체제를 점진적으로 확립해야지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얘기였다. 김정일의 정치활동상 문제를 걸어 사실상 김정일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토론과정에서 일부 간부가 김동규에게 부분적으로 동조해 일파만파로 번졌다. 당시 사법검찰·사회안전부문 담당비서 류장식은 간부사업에서 나타난 노장파의 불만을 대변한 김동규에 동조하면서 보위부의 업무실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용무는 확고한 입장표명은 유보한채 군내 정치간부들의 사례를 들면서 김동규에 약간 기울어졌다.
그밖에 지경수·지병학 등은 김동규에 동조한 것은 아니지만 입장을 명백히 밝히지 않아 김동규 동조세력으로 몰렸다. 당시 김동규 반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김동규일파로 몰리는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노동당 소용돌이>
김동규는 당비서이자 국가부주석으로 김일성·김정일 다음의 서열을 누리고 있던 권력핵심인사였다. 김 일성이 건강이 좋지 않아 실무에서 손뗀 상태여서 김동규는 2인자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을 비판하고 나서자 노동당은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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