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실비서실(123)전대통령 첫 작품 미국도 놀란 김대중 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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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82년 12월중순 전두환대통령은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노태우 내무·배명인 법무·이진희 문공장관 및 노신영 안기부장, 그리고 황영시 육군참모층장·정호용3군사령관·박준병 보안사령관을 갑자기 불러모았다. 청와대 대접견실에 모인 참석자들은 자기들이 왜 불려 왔는지를 몰라 모두 눈짓으로 궁금증을 드러냈다. 또 묘하게도 이런 정도의 자리라면 의당 끼어야할 허화평 정무1수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 다소 의아스러웠다. 그럼에도 참석자들은 면면의 비중으로 봐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있구나 짐작했다.

<공식발표까지 보안>
전두환대통령이 영문을 몰라하는 일행 앞에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났다.
전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중요한 결정을 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고 입을 열었다. 가벼운 흥분같은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운을 떼 놓고 그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전대통령의 억양이 높아지면서 본론이 나왔다.
『김대중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실내는 물을 끼얹은 듯 했다.
참석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전대통령의 얼굴을 다시 쳐다볼 즈음 그는 『자 그렇게들 아시고 다들 바쁠 텐데 돌아가 일 보시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먼저 나가버렸다.
김대중씨(DJ) 문제는 함부로 얘기를 꺼내기 어려운, 5공 주역들에겐 중요하고도 미묘한 사안이었다. 웬만하면 참모들의 의견을 물어 판단할만한 일이었고 그런 문제가 전대통령의 전격적인 결단에 의해 이처럼 처리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대통령이 대접견실을 나간 뒤 참석자들에게는 공식발표때까지 일체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는 당부가 전달됐다.
비슷한 시점의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 -.
유병현대사·손장래 안기부공사도 김대중씨가 석방되어 미국으로 갈 것이라는 비밀 급전을 받았다. 2년전인 80년11월 이들 두 명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씨를 감형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전대통령의 미국방문을 리처드 앨런(레이건 미대통령 보좌관)과 막후 거래해 관철시킨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번 김대중씨의 석방과 미국행조치에는 사전에 상의받거나 개입하지 않았다. 앨런은 정호용 대장이 80년12월 특전사령관시절 아시아태평양지역 특전장교회의에 참석한길에 만나 김대중씨 감형문제를 거론하기도 했었다.
허화평 정무수석은 뒤늦게 이 내용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전대통령의 신임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을 확인하고 마음으로부터 떠날 준비를 했다고 한다. 며칠뒤인 12월20일 그는 경질된다. 남미에 외유중이던 김상협총리는 공식발표가 난 뒤에야 알았다.
전대통령은 공식발표 하루전인 12월15일 아침 민정당수뇌부를 청와대로 불렀다. 이재형대표·권익현총장·이종찬총무·진의종정책의장과 조찬하면서 김대중씨 석방·방미허용결정을 들려주고 「보안을 유지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대중씨 석방은 이처럼 전대통령의 「깜짝쇼」였다. 그러나 전대통령 본인은 그것을 구상하고 연출하기까지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였음이 틀림없다.
전대통령은 그 해 5월 이철희·장영자 거액어음사기사건으로 내연한 권부의 갈등을 정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잡기 위해 칼을 빼들 시기를 재고 있었다.

<권력무상 벌써 실감>
제일처음 내놓은 카드가 금융실명제였다.
그러나 실명제는 양허(허화평 정무1·허삼수 사정수석)의 주도에 의한 여권내의 조직적인 반대로 꺾이고 말았다. 금융실명제가 무산된 후 전대통령은 내심 체면손상에 화가 나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두 허수석의 기를 꺾고 통치권의 훼손을 만회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민정당 출신 민자당의원 Q씨의 설명.
『대권을 잡은지 2년4개월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때쯤 통치의 직영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생각이 전대통렁의 머리속에 꽉 차 있었지요.
지금부터 5공창출의 주주라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중간보스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것이지요. 거기에 맞춰 국정을 운영하면서 구체적인 케이스를 찾은 겁니다.
김대중씨 문제는 그 시점에서 절묘한 카드였지요.
전대통령은 그 문제에 관해 노신영부장 이외에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전대통렴이 먼저 아이디어를 냈는지, 노부장이 먼저 건의를 했는지는 둘 중 한 명이 입을 열지않는 한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전대통령이 「그거다」고 무릎을 쳤고 노부장과 긴밀히 의논했다.
전대통령은 「김대중석방」이 국민대화합을 과시하고 인도적 조치로 국제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추진했다.
바로 넉달 전 전대통령은 8·15 특사로 김대중씨를 석방시키려 했으나 「시기가 빠르다」는 군부쪽의 반발로 실전에 옮기지 못한바 있어 이번에야말로 더욱 비밀리에 추진한 것이다.
유학성 안기부장 후임으로 들어온 노신영 부장은 외무장관때부터 전대통령의 신임을 착실히 쌓아왔다.
그는 80년9월 외무장관에 임명되면서 김대중씨를 사형시키면 미국과의 다리가 영영 끊어질지 모른다는 판단보고를 올린 적이 있다.
안기부장이 되면서 그가 좀더 적극적으로 김대중문제에 접근했으리라 추측된다.
당시 김씨는 청주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80년 5·17후 내란음모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어 무기→징역20년으로 감형된 그는 감옥에서 성경봉독과 화단가꾸기, 그리고 열정적인 독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좌절과 시련의 세월동안 깨알같은 글씨로 2만자가 넘게 적은 봉함엽서를 한달에 한번씩 가족들에게 보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때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후일 책으로 나왔다. 「용서와 사랑은 진실로 너그러운 강자만이 할 수 있다. 용서와 사랑을 거부해 가지고는 인간사회의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성취할 수 없다」「꽃이 죽은 겨울은 운동시간에 나가도 재미가 없어요. 이제 봄이 오니 기대가 큽니다」 「목표는 높이 잡고 실천은 한 단계씩 착실하게 나가라. 무리도 말고 쉬지도 말라」는 것 등이 편지의 내용들이다.
아무튼 전대통령은 김대중씨의 석방·미국행에 따른 국내외적인 반응을 점검하면서 크리스마스전에 일을 끝낸다는 방침을 정했다.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노신영 부장이 직접 김씨의 부인 이희호여사를 만나 의향을 물었다.
12월11일 노부장과 이여사의 만남이 궁정동 안가에서 이루어졌다. 이여사가 자서전에서 밝힌 증언.

<8·15특사계획 불발>
『노부장이 만나자고 한다는 연락을 안기부의 한 직원이 전해왔어요. 안기부장을 만나려면 원래안기부 차를 타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우리차를 타고 정부종합청사로 오라고 하더군요. 청사후문에 도착해 대기하던 안기부직원의 차를 갈아타고 갔습니다. 노부장은 「내 임기중에 김대중씨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니 남편에게 미국에 가서 2, 3년 병치료를 받으라고 권하라」 고 하더군요.
그는 아무에게도 일절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틀 뒤 이여사는 청주교도소로 김씨를 만나러 갔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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