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들 아직 옥중에 있다" DJ, 처음엔 완강히 거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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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교도소에 도착하니 안기부직원이 먼저 와있었어요. 특별면회가 이루어졌지요. 내가 미국에 가자고 권유했지요. 남편은 오전 내내 「미국에는 가고 싶지도 않고 갈 필요도 없으니 가지 않겠다.
같이 구속된 많은 사람들이 아직 옥중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 곳에 갈 수 있느냐」고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오후에 다시 만나 「우리가 미국으로 떠나야 같이 구속된 분들도 나오게 된다」고 강력히 권했지요. 남편은 할 수 없이 떠나기로 하고 간단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안기부직원은 「병치료에만 전념하고 정치활동은 안하겠다고 적으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나는 미국에 가서 인권문제에 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내가 정부에 매수되었다고 보지 않겠느냐. 어차피 정정법으로 묶여 있어 정치활동도 못하게 돼있는데 안 쓰면 어떠냐」고 했다.

<미국압력은 전무>
그런데도 안기부직원이 우겨대서 결국 쓰게 됐습니다. 나중에 약속과 달리 정부는 그것을 공개했습니다.』
김대중씨의 미국행이 확정됐다는 보고를 받은 전대통령은 이것을 어떻게 정부요로에 알려줄까 궁리했다. 관계부처장관, 그리고 군수뇌부를 집합시켰다. 군은 사형선고를 내린 장본인격이다. 전대통령은 5월 중순 이·장사건이 한창일 때 12·12와 5·17을 주도한 5공주체13명이 자기 몰래 모여 대통령 친·인척들의 공·사직 2선 후퇴를 집단 건의해온 것을 상기한 듯 했다. 이번에는 그 반대로 이들을 모아놓고 통치의지를 과시하겠다는 뜻도 있는 듯 했다. 당시 권력핵심에 있었던 Q씨의 증언.
『김씨의 석방은 국민적 화해·구시대청산이라는 대외적 명분이 고려됐습니다. 그러나 권력핵심에선 자신의 판단과 의지대로 국정을 운영한다는 전대통령의 선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전대통령의 친정의지 첫 작품이 아이로니컬하게도 김대중씨 석방인 셈이었지요.』
정부고위관리출신 Z씨의 증언.
『김대중씨 석방은 미국 등 세계인권단체의 주요 관심사항이었지요. 그렇지만 미국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뒤 김대중씨 문제를 우선순위에 포함시키지 않았어요. 물론 미국의 인권단체, 의회일부에서 김대중씨 석방을 줄기차게 들고 나왔지만 미국정부의 압력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전대통령의 이니셔티브였고 국내정치용이었지요.』
공식 발표직전 정부는 워커미대사와 케네디CIA지부장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당시 이 업무에 관여했던 관계자의 기억. 『워커대사의 첫 반응은「농담하냐」는 것이었죠.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김씨의 비자를 발급해주겠느냐고 물으니까 「오늘이라도 내주겠다」며 대환영이었지요.』
김대중씨의 미국출국으로 한미현안이 하나 마무리됐다. 사실 80년 11월 레이건이 미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한미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전대통령의 5공세력은 12·12와 5·17을 거치면서 한미관계를 좋게 해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신군부측은 베시·스틸웰·싱글러브장군 등 주한미군지휘부 출신을 통해 워싱턴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했고 레이건측과 끊임없이 접촉노력을 했다. 맨 처음 돌파구를 연 것은 유병신 합참의장이었다.

<"비자 당장 내주겠다">
레이건정권 인수팀의 앨런은 김대중씨를 사형시키면 한미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유의장에게 전달했다.
계장래 주미공사는 김대중씨의 사형면제와 전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앨런과 구체적으로 흥정했다. 이 두 가지 사안이 이뤄진 뒤 한미관계는 급속히 회복되였다. 미국도 김씨를 석방시키지 않는다 하여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는 않았다.
김씨의 도미는 『그렇게 빨리 진행될 줄 몰랐다』는 이희호여사의 회고처럼 신속히 추진됐다. 16일 아침 김씨는 청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 12층 특실로 옮겨졌다. 이날 아침 청주교도소 감방 앞 복도의 스토브옆에 두었던 진달래가 석방을 축하하듯 추운 겨울에도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한다.
병원이송과 함께 정부대변인 이진희 문공장관이 이 사실을 처음 공표했다.
『국가보안법과 계엄령을 위반해 복역중인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 지병을 치료토록 조치했다. 앞으로 김대중 본인과 그 가족의 희망을 참작, 미국에서 신병치료를 하는 것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다. 이같은 정부방침은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민대화합을 이룩하려는 5공화국의 의지와 전대통령각하의 인도주의적 배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발표가 나오자 김씨는 곤혹스러웠다. 『남편은 「정부당국이 내 건강도 악화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마치 선심이나 쓰듯이 발표하고, 나와 같이 고생하는 구속자도 석방되지 않았는데 지금 내가 왜 도망가는 사람처럼 서둘러 떠나겠느냐」며 미국에 안 간다고 화를 냈다. 당국에서는 23일 떠나야 24일 같이 구속된 사람들이 나오게된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떠나기로 했으니 그대로 떠나자고 남편을 설득했다」(이희호여사 회고록)
12월16일 서울대법원 이송에서부터 23일밤 미국행까지 일반인에 김대중씨는 철저히 차단됐다. 기자들은 사진을 찍으려고 서울대병원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놓쳤다. 공항에서도 당초 KAL기를 타는 것으로 했다가 NWA기를 탑승해 역시 허탕쳤다. 서울에 남은 장남 홍일 씨도 마찬가지였다. 김씨가 기내에 앉자 경주교도소 부소장은 「형집행정지로 석방한다」는 서류를 읽었다.
2년7개월간의 수형생활을 끝내고 그는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나면서「이제 가면」이란 단시를 읊었다.
「…/이제가면/언제올까 기약 없는 길이지만/반드시 돌아오리 새벽처럼 돌아오리/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 박보균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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