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 통폐합 '작명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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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인구가 적은 동(洞)을 묶어 정부가 통합을 추진하자 새로운 동 이름을 놓고 벌써부터 '동명(洞名)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서울시는 두 동을 통합하면 새로운 제3의 이름을 붙이거나 두 동 중 한 곳의 이름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러자 주민들이 왜 내가 사는 동 이름을 바꾸냐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역사가 깊은 곳일수록 동 이름을 포기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크다.

반면 과거 달동네라는 인식이 강해 주민의 호감이 높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참에 동네 이름을 바꾸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지역은 동네 이름을 바꾸면 집값이 올라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동 통폐합에 따른 개명은 자치구별로 주민 의견을 들어 구 조례를 개정해야 한다.

◆ 동명 분쟁=행정자치부는 최근 전국에서 인구 2만 명(지역에 따라 1만 명) 이하의 행정 동을 인접 동과 통합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서울시도 자체적으로 올해와 내년에 걸쳐 518개 행정 동 중에서 200개 동을 100개 동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동명 분쟁으로 가장 큰 진통을 겪는 곳은 종로구다. 역사가 깊으며 몇 세대에 걸쳐 살고 있는 토박이가 많기 때문이다. 종로구에서는 삼청동-가회동, 청운동-효자동, 명륜3가동-혜화동 등이 각각 합치게 돼 있다.

"대한민국에서 삼청동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삼청동의 브랜드 가치를 절대 포기 못 한다"(삼청동 주민)

"면적과 주민 수에서 가회동이 월등하다. 당연히 가회동으로 합쳐야 한다"(가회동 주민)

가회동 주민 1000명이 회원인 사단법인 북촌가꾸기회 이형술(70) 회장은 "가회동은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한 뒤 613년 동안 써 온 뿌리 깊은 이름이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삼청동 주민 모임인 삼청동번영회 이건선(67) 회장도 "새 이름을 정하도록 강요한다면 삼청동과 가회동 주민 간에 큰 다툼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제3의 이름을 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반대하고 있다. "뿌리 깊은 이름을 왜 버리느냐"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민 사이에선 통합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내년부터 같은 동 이름을 써야 하는 청운동과 효자동도 입장이 갈린다.

"종로가 서울 1번지라면, 청운동은 종로 1번지다"(임형경 청운동 주민자치위원장)

"효자가 많아 이름 높았고, 인구도 청운동보다 두 배나 많다"(정흥우 효자동 주민자치위원장)

구청은 일방적으로 이름을 정하지 않고 주민끼리 합의를 유도할 방침이다. 종로구청 이승열 자치행정팀장은 "동 이름에 대한 주민의 자부심과 애향심이 대단해 통합 자체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이참에 이름 바꾸자"=재개발 뒤 신흥 아파트촌으로 떠오른 서울 관악구는 이번에 동 통합작업을 계기로 전체 동 이름을 손보기로 했다. '봉천' 이나 '신림'이 들어간 동 이름이 달동네를 연상한다는 판단에서다. 주민들도 "달동네를 연상하는 예전 이름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다"며 동 이름 변경을 원하고 있다. 서울시가 11일 동 통합 계획을 발표하면서 봉천본동.봉천9동 통합 동의 후보 명칭을 '봉천동'으로 내놓자 관악구청에는 "왜 봉천동이라는 이름을 계속 써야 하느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관악구는 '신림' '봉천'이 들어가는 20여개 동을 성현동.청릉동.금란동.미성동 등으로 바꿀 계획이다.

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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