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살 못 믿겠다" 가족들 오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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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 한국인 중 한 명이 살해됐다는 보도가 전해진 25일 밤 서울 서초동 한민족복지재단에서 가족들이 울먹이며 회의실을 나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프간에서 피랍된 봉사자들의 가족은 25일 희망과 충격, 기대와 공포를 차례로 겪으며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전날 밤 '협상 급진전' 소식에 서울 서초동 한민족복지재단에 모여 있던 가족들은 이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오후 4시30분쯤 '인질 일부를 살해하겠다'는 탈레반의 협박에 사무실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이어 아프간 정부가 몸값을 이미 지불했고 곧 일부가 석방된다는 외신에 환호했고, 인질 한 명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이어지면서 넋이 나갔다. 한 가족은 "도대체 어떤 말이 사실인지 모르겠다"며 "죽었다는 말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절규했다.

◆ 엇갈리는 소식에 애타는 가족=25일 오후 9시20분 재단 사무실에 켜진 TV 화면에 뉴스 속보가 떴다. 탈레반 대변인이 "인질 중 한 명을 살해했다"고 발표했다는 내용이었다. 가족들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인질 8명이 풀려났다'는 보도에 가족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일부 가족은 친지들의 '때 이른' 축하전화를 받느라 분주했었다.

사무실을 나와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가족들은 완전히 다른 보도에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한 가족은 "내 아들은, 내 아들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라는 말을 되뇌며 말을 잇지 못했다. 뒤이어 확인되지 않은 소식이 계속 날아들었다. 정부는 "인질 8명이 이미 석방돼 이동 중"이라고 발표했지만 외신은 "숨진 인질이 병으로 죽었다" "아프간 정부가 살해됐다고 확인했다"는 엇갈린 보도가 이어졌다. 일부 가족은 "며칠 전 탈레반 대변인이 독일인 피랍자를 죽였다는 발표를 했지만 결국 거짓으로 판명 났다"며 "분명히 몸값을 높여 받으려는 협상 전략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살해됐다'는 외신의 빈도가 높아지면서 가족들은 충격에 말을 내놓지 못했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숨진 인질이 배형규 목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무실은 또 한 번 술렁였다. 배 목사의 가족은 사건 발생 직후 집을 비운 채 재단 사무실에도 나오지 않고 있다. 분당 샘물교회 근처에 있는 배 목사의 집을 지키고 있는 처남은 취재진의 질문에 놀란 얼굴로 "더 이상 얘기할 게 없다"며 문을 닫았다.

오후 11시쯤 8명의 인질이 석방됐다는 사실이 보도됐지만 침통한 분위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일부 외신이 인질 석방 보도 자체를 부인하자 가족들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남매가 함께 인질로 붙잡힌 서정배(57)씨는 침통한 표정으로 "모두 풀려나야 할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탈레반이 여성 인질을 먼저 석방할 것'이라는 외신에도 희비가 교차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어머니는 "솔직히 여자만 풀어 준다고 하니 속상하다. (탈레반이) 더 심한 협상 조건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봉사단원이 소속된 샘물교회도 한순간에 눈물바다로 변했다. 이날 오후 8시부터 교회 2층 본당에 모여 석방을 기원하던 1000여 명의 신도 중 일부는 인질이 살해됐다는 외신이 전해지자 본당을 나오면서 "안 돼! 안 돼!"라고 소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신도들은 교회 로비로 들어와 얼굴을 감싸며 오열했다. 교회 대책반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며 공식적 반응을 자제했다.

◆ 건강 악화 우려=인질들의 건강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정기적으로 약을 투약하던 봉사자들의 가족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예정된 귀국 일자를 넘긴 상태라 준비해 간 약이 부족해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한때 숨진 인질이 병으로 죽었다는 미확인 보도가 나오면서 가족들의 걱정은 극에 달했다.

한민족복지재단과 피랍자 가족들에 따르면 봉사단원 23명 중 약 세 명이 주기적으로 약을 복용해 왔다고 한다. 살해된 것으로 보도된 배형규(42) 목사도 호흡기 관련 희귀병을 앓다가 수년 전 호전됐다. 대학 동창인 박재홍(44)씨는 "배 목사가 수년간 치료하다 2005년 제주도에서 요양한 뒤 나아졌다"며 "감금 상태가 길어지면 다시 건강이 나빠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박유미.장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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