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장수사 “정치권 불안”/“다음 차례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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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비자금행방 추적에 “불똥”걱정/6공 정경유착 본격사정 기미
안영모동화은행장의 비자금이 수사선상에 올랐다는 얘기가 퍼지자 정치권이 가장 먼저 긴장하고 있다. 관련 가능성이 추정되는 의원들은 「무관」을 주장하고 있으나 대다수 의원들은 「유관」의 개연성을 인정하면서 수사의 방향과 강도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수사방향에 관심집중
○…민자당의원들은 연루가능성이 점쳐지는 몇몇 의원들외에도 과거 정치자금의 뿌리를 파고드는 듯한 사건의 심각성에 잔뜩 긴장하는 분위기.
언론에 오르내리는 당사자인 K모의원은 『안영모은행장과 커피 한잔 같이한 적 없다』며 일면식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고 L모의원은 장기입원중이라 아무 반응이 없다.
불똥의 가능성을 예상하는 의원들은 과거 금융계의 황제로 통했던 L·K의원과 6공의 실력자 P의원 등의 연루가능성을 인정한다. 한 의원은 『왜 동화은행과 보람은행 등이 문제가 되겠느냐』며 『은행을 하나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이권이다. 따라서 당연히 당대의 핵심권력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6공 당시 만들어진 신생은행을 수사한다는 것은 당시 권력의 핵심도 개혁 대상으로 삼겠다는 의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금융계를 잘 아는 다른 의원은 『은행장의 비자금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연명을 위해 쓰이는 돈 아니냐. 금융계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인사에게 흘러들어가게 마련』이라면서 『당시 금융계에서 「모든 길은 모씨로 통한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상기시켰다. 비자금수사의 종국은 정치권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보다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의원들은 『수사가 그렇게까지 확대되겠느냐』며 파문의 심대함에 우려를 보인다. 민주계 한 의원은 『과거의 잘못된 금융관행을 고치자는 뜻에서 수사가 진행되는 것으로 안다. 권력에 의해 잘못된 관행이 있었지만 과거의 일을 일일이 들춰내자는 의도는 아니다』며 『은행장들의 비자금이 수사대상에 올랐지만 그 규모로 봤을때 정치자금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것 같다』고 말한다. 정치권에서는 은행장의 비자금이 드러난 현단계를 수사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 문제는 비자금의 뿌리인 편법대출금을 추적하는 데까지 수사가 확산될 경우 경원대 수사과정에서 보여지듯 정치권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다. 이 경우 정치자금이라는 핵심을 건드리는 것이기에 그 파문은 재산공개 등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일 것이다.
○…청와대는 안영모행장 구속을 「특정 정치인」에 대한 목조르기로 보는 관측에 대해선 매우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공식적으론 부인.
한 수석비서관은 『안 행장의 비자금 추적과정에서 정치인과의 「연계」가 드러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며 수사진척과정에 정치인이 「걸려들」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특정 정치인을 치기 위해 은행장을 수사하는 식의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청와대측은 정치인이 「걸려들」 경우라도 정치헌금으로 판명되면 사법조치는 곤란하다는 판단이다. 정치인의 처벌은 대출과정의 특혜 알선·압력 등 「딱 떨어지는」 법위반만을 대상으로 삼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같은 입장표명에도 불구,안 행장이 새정부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L·P의원과 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점에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는데 대해 청와대는 어정쩡한 입장이다.
○청와대선 강력히 부인
자칫 정치보복의 인상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측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개발에 나서고 있으나 쉽지 않아 여간 고민이 아니다.
한 고위관계자는 『과거를 일부러 들추지 않는 미래지향적 사정방침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면서도 『그러나 특정 사안과 관련된 고발·고소 등이 있으면 「손대지」 않을 수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고발·고소를 조사하다보면 과거에 「재미본」,즉 6공 고위인사들이 자연스레 내사선상에 떠오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면이 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안 행장 구속을 정치인에 대한 우회적 접근방식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고위관계자는 『5공청산 과정을 생생히 알고 있는 「문제」의 정치인들이 이런 경우를 대비,물증을 일절 남기지 않았다』며 『심증만 갖고 그들을 바로 내사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해 금융계 사정이 정치판을 향한 우회로와 결코 무관치 않음을 시사했다.
○…민주당은 최근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는 금융계 「사정바람」에 대해 그 자체를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배경에 대해선 의혹의 눈길. 금융계 비리 척결에 반대할 국민이 없겠지만 정치권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뚜렷이 손에 잡히는 증거는 없지만 5,6공 정치자금 조성에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 민자당의 L·K의원과 「6공 실세」였던 국민당의 P의원 등을 겨냥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고 있다.
○민주,수사배경에 의혹
금융계 비리수사에 대한 박지원대변인의 23일 논평도 이같은 입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이 논평에서 『잇따른 금융계 사정이 부정부패 척결 차원이라면 이를 적극 지지한다』며 『그러나 여론을 등에 업고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교묘한 방법으로 특정인을 겨냥하고 있다면 이는 「계산된 숙청」이라고 주장했다.
조세형최고위원은 『금융계 비리 수사 등 김영삼대통령의 부정부패 척결은 잘 하는 일』이라고 일단 긍정평가했다. 그는 『다만 특정인을 목표로 한 건수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는 경제개혁 등 법과 제도·프로그램을 만들어 형평성이 존중돼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김 대통령의 개혁의지가 희석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P의원측은 P의원이 6공때 금융 업무와 무관했다는 점을 들어 금융계 사정이 L·K의원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김현일·신성호·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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