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103)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그림=김태헌

다음날 집에 갈 무렵에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아빠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태우고 B시까지 달렸다. 차 안에는 이상한 공기가 고체처럼 꽉 차 있어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차라리 혼자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걸 그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B시 엄마 집 앞에 도착해 아빠가 차를 세웠는데, 나는 무슨 말인가 아빠에게 하려고 아빠 쪽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는데 아빠는 완강한 옆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안하다, 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잘하고… 당분간은 우리 서로 좀 생각할 시간을 갖자.”

아빠의 말은 그러니까 당분간은 서로 아마 만나지도 연락할 시간을 가지지도 말자는 뜻일 것이었다. 언젠가 두 달 동안 데이트를 했던 남자 아이도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아직 그 아이가 싫어진 것이 아니어서,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일주일이 넘도록 끙끙댔었다. 절대로 그 말이 “이제 더 이상 네가 보기 싫다”라는 말인 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인정할 수 없으니 그 언저리를 돌았고 섣부른 희망 같은 것을 가졌고, 그러니 몹시 피곤했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니 아빠가 그런 말을 꺼내자 나는 차에서 선뜻 내려서, 그래! 하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영원한 쳇바퀴를 도는 것일까, 아빠는 여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리자 아빠는 이제 아빠로서의 의무는 여기까지, 라는 듯 횅하니 차를 출발시켜 떠나버렸다. 아무리 아빠지만 자존심이 상했고, 혹시나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나 싶어서 얼른 휴대폰으로 아빠의 번호를 눌렀지만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세 번쯤 다시 걸었는데도 그랬다. 어리석게도 그게 “나는 지금 너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뜻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저녁 무렵 엄마는 B시에서 돌아왔다. 엄마의 서재에 마주 앉았을 때, 내 이야기를 길게 듣던 엄마는 내가 했던 행동에 대해 몇 번이나 멈칫멈칫, 하더니 “그래 잘했다” 하고 짧게 말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당분간 보지 말자고 해. 아니, …어쩌면 다시는 나를 안 보려고 하나 봐.”

나는 약간 울먹였다. 엄마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눈길은 좀 엄했다. 생각 탓이었을까, 나는 벌 받으러 교무실에 온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위녕,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 결과는 네 것이야. 온전히 네 것이야. 그게 무어든 너는 그걸 받아들여야 해. 아빠는 아빠지만 너는 아니니까. 네가 아빠가 네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기를 바랄 수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하나뿐이야. 아빠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거나, 왜 나를 이해 못하나, 하고 괴로워하지마.”

엄마의 말은 의외로 냉정했다. 엄마까지 냉정하게 나오는 것을 보자, 나는 정말이지 냉정해지기 싫었다. 내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자 엄마는 잠시 나를 외면하고 책상의 책들을 정리하는 척했다. 평소에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하지도 않는 엄마가 그러는 것은 엄마의 마음도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네 아빠,” 엄마는 책상의 책들을 들어 탁탁, 소리 나게 치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어. 어쨌든 아빠는 네게 의무를 다했잖아. 자식한테 그런 소리 듣고, 멀쩡한 사람이 어디 있겠니?”

“그러면! 엄마는 왜 나보고 하고 싶은 대로 했어? 이렇게 될 줄 예상했으면서! 왜 그랬어? 날 붙잡지 그랬어?”

내 말이 투정이고 어리광이고 떼라는 것을 알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책들을 책꽂이에 꽂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위녕, 엄마는 네게 그런 방법이 좋은 게 아니라고 말했어. 하지만 너는 듣지 않았고. 너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그때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어. 너의 나쁜 결정에 동참해 주는 것, 그래서 같이 후회하는 것. 엄마도 너와 같이 되는 것….”
 
엄마는 말을 마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