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人 정치IN] 나경원과 쪽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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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06면

판사 출신인 한나라당 나경원(44)의원이 직장을 법원에서 국회로 바꾸는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두 명이다. 김유나(14)양과 노무현 대통령.

유나는 나 의원의 딸이다. 다운증후군을 앓아 생활이 조금 불편하다. 다행히 유나는 밝고 사랑스럽게 커 엄마는 기뻤는데 취학 무렵 충격적인 일을 당했다. 한 사립학교에 진학시키려다 교장에게서 “엄마, 꿈 깨. 장애인은 교육시켜 봐야 똑같아”라는 반말투 핀잔을 들었다.

미봉적 태도로 일관하던 교육부는 그가 판사 신분을 밝히며 위반 법 조항을 조목조목 따지고서야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 의원은 “한 건 한 건의 판결로 세상을 바꾸기엔 벅차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직전 한 선배 여성 법관의 권유로 이회창 후보 특보직을 맡았다. 한나라당의 17대 총선 공천심사위원이 되고 비례대표 후보 신청서를 낼 때만 해도 소극적이었다. 그때 노 대통령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나 의원은 “너무 화가 나 꼭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전업은 유나에게도 노 대통령에게도 불행이었을까?

1년 전 당 대변인에 오른 나 의원은 법률지식을 무기로 ‘선거법 위반’ ‘업무 방해’ 같은 죄목을 적시하며 노 대통령을 공격했다.

유나와 남동생 현조(10)는 엄마를 빼앗겼다. 당직자나 기자의 전화로 하루를 시작해 늦은 밤 돌아오는 엄마.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그나마 소통 수단이다. 20일 나 의원의 휴대전화엔 ‘사랑해 엄마♥’ ‘안약 좀 갖다 주세요’ 같은 유나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유나는 새 재미를 찾았다. 지난해 5월 테러를 당한 박근혜 전 대표에게 편지를 쓴 이후 엄마에게 가끔씩 쪽지를 건넨다.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긴 모양이다.

청와대·한나라당 영수회담이 있던 지난 2월 9일 유나는 “대통령께 전해 달라”며 쪽지를 내밀었다. 내용을 본 나 의원은 움찔했다. ‘노무현 대통령 은혜에 항상 감사드려요’. 엄마의 논평과는 영 딴판이다. 쪽지는 전달이 안 됐다. 회담이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나 의원은 그 쪽지를 서랍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 본다.

그는 “이기기 위해선 뭐든지 한다는 정치 풍토가 과연 옳은 건지 고민하게 한다”며 “요즘 우리 당 후보 간 비방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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