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피플] ‘햇살과 나무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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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이들이 몰입할 수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햇살과 나무꾼’ 식구들. 가운데 앉은 사람이 강무홍 주간이다. 김성룡 기자

  누가 번역했나를 보고 책을 고르는 사람도 꽤 많다. 매끈한 번역 문장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그 번역가가 고른 책이라면…’이란 신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햇살과 나무꾼 옮김’이란 표시는 어린이책에서 상당히 권위 있는 ‘간판’이다. ‘햇살과 나무꾼’이 도대체 누굴까. 서울 연남동 사무실은 명성에 비해 소박했다.

 ‘햇살과 나무꾼’은 1991년 강무홍(45) 주간과 박정선(43) 기획실장이 주축이 돼 만든 ‘어린이책 기획·번역·집필 집단’이다. 두 사람은 이른바 ‘80년대 운동권’이었다.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조활동을 했을 정도니, 부화뇌동의 수준이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그 때만 해도 출판사들이 어린이책에 별 관심이 없었거든요.”(강)
 이름 ‘햇살과 나무꾼’도 추운 겨울날 나무꾼한테 햇살이 위로가 되듯 책이 아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

 “초창기엔 힘들었죠. 출판사에 이 책을 내보자고 제안하면 ‘애들 책에 뭐 돈을 들이냐’는 반응이었어요.”(박)
 그도 그럴 것이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국내 출판계에 저작권 개념이 제대로 없었다. 원작은 보지도 않은 채 일본어판을 들고 중역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시작할 때는 소외된 영역이었다지만, 어린이책은 곧 출판계의 블루오션이 됐다. 박 실장이 “이젠 B급·C급 작품까지 너무 많은 외서가 무분별하게 들어와 문제”라고 말할 정도다. 그동안 ‘햇살과 나무꾼’이 찾아내 번역한 책은 1000권이 넘는다. “원작의 향기만 남도록 번역자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게”가 이들의 번역 원칙이다.

 99년부터 ‘햇살과 나무꾼’은 논픽션 중심으로 직접 집필 작업도 한다. 아이들이 외국 사람이 쓴 역사책·과학책만 읽고 자라면 서양 중심의 세계관을 갖게 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그동안 『위대한 발명품이 나를 울려요』(사계절), 『거꾸로 살아가는 동식물 이야기』(지경사) 등 ‘햇살과 나무꾼’이 저자가 돼 내놓은 책도 100여권에 달한다.

 현재 ‘햇살과 나무꾼’에는 강 주간과 박 실장 외에도 이선아(40) 일어팀장, 우순교(36) 집필팀장, 영어팀 안민희(23)씨, 관리팀 오은미(22)씨가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이 스스로 좋은 책이라고 골라 번역한 책에는 ‘햇살과 나무꾼’이름을 붙이지만, 출판사에서 번역만 의뢰받아 옮긴 책에는 각자의 이름을 역자로 올린다. 개인의 이름보다 ‘햇살과 나무꾼’이름의 권위를 지키려는 노력이다.

 “출판사를 내보라는 제안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러면 돈벌이만 생각할 것 같아서….” 어린이책만 읽어서인지 불혹을 넘긴 강 주간의 얼굴엔 동심이 가득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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