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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낚시통신』은 레저 서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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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중·고교 시절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일과 서가 정리, 도서관 청소를 하는 대가로 학비 일부를 면제받았다. 덕분에 책과 사귈 수 있었다. 책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종이가 손을 깊이 벨 정도로 날카로운 물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무엇보다 마음껏 책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선생님들께 미안하지만 고전 세계 명작이 ‘마음의 양식’ 역할만 해준 것은 아니었다. 『육체의 악마』나 『보바리 부인』의 특정 장면은 사춘기 중학생의 성적(性的) 설렘을 부추겼다. 고교 도서관 서가 구석에는 『베리야 일대기』라는 낡은 책이 있었는데, 유신 치하이던 1970년대 중반에 소련 비밀경찰 총수의 전기가 어떻게 고등학교 도서관에 살아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당시에도 학교 도서관 서가는 한국형 십진분류법(KDC)에 따라 정리돼 있었다. 듀이 십진분류법(DDC)을 변형한 것이다. 0번대의 ‘총류’에서 시작해 9번대의 ‘역사’로 마무리된다. 학우들이 많이 찾는 8번대 ‘문학’ 코너에 꽂힌 책 전부를 눈 감고도 찾을 때쯤 고교 시절도 끝나 가고 있었다.

얼마 전 한 중견 출판사 대표와 도서 분류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화관광부는 5월 10일 각 출판사에 ‘문화관광부 우수 학술도서 선정·지원 계획 공고’라는 공문을 보냈다. 우수 학술도서 선정은 채산성 낮은 학술 출판을 활성화하고 출판계의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하는 사업이다. 공문 말미의 ‘국제표준도서번호(ISBN) 부가기호가 9로 표기된 책을 선정 대상으로 한다’는 구절 때문에 적지 않은 출판사가 고민했다고 한다. 부가기호 ‘9’는 학술도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9’로 분류되지 않았더라도 학술도서임에 틀림없는 책이 많다. 출판사들은 이런 책에는 사유서를 따로 붙여 우수 도서 지정 신청을 했다고 한다.

고전적인 도서 분류법이 출판계나 서점가에서 도전받은 지는 꽤 됐다. 강력해진 검색 기능 덕분이다. 학문 분야 간 넘나들기 현상이 가속된 것도 요인이다. 한국도서관협회 이용운 기획부장은 “요새는 목차나 머리말까지 컴퓨터에 입력되기 때문에 도서 분류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고 진단한다. 그렇더라도 검색 기능이 만능은 아니다. 책의 수만 단어를 다 검색해도 어떤 주제의 책인지 끝내 모를 수 있다. 결국 사람이 키워드를 정확하게 지정해 놓아야 독자들이 헷갈리지 않는다. 십진 분류든 주제어 분류든 도서 분류의 필요성은 여전한 것이다.

출판계에는 윤대녕의 소설 『은어낚시통신』이 처음 나왔을 때 서점 레저 코너에 진열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정재승의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는 예술(영화)로 가야 할까, 과학 코너에 꽂아야 할까. 법정 스님의 수필집은 문학인가 종교인가. 여기에 출판사와 서점 간 이해다툼까지 끼어든다. 출판사는 서점에서 독자들이 붐비는 ‘자기계발’ 같은 인기 코너에 책이 진열되길 원한다. 그러나 서점들은 자체 기준을 따로 만들어 배치할 서가를 결정한다. 출판사는 책이 엉뚱한 서가에 꽂혔다며 서운해 하지만, 서점은 “일부 출판사가 장삿속 분류를 하고 있어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고 항변한다.

결국 여기에도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신뢰 문제가 깔려 있는 셈이다. 출판인회의 한성봉 대외협력위원장은 “책을 가장 잘 아는 쪽은 저자와 출판사”라며 “출판사들이 먼저 나서서 판권 표시 부분에 양심적으로 정확하게 도서 분류를 명시하고, 서점도 이를 수용하는 풍토가 조성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크로스오버 책이라면 1·2·3순위 분류를 다 나열하면 독자에게도 편리할 듯하다. 국립중앙도서관이 4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출판 시점 도서목록(CIP) 서비스에 주제어 부여 기능 등을 추가해 널리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매일 신간이 쏟아지는데 독자 입장에선 무슨 책인지 가려 내기가 참 힘들다. 사재기나 경품 행사 같은 비뚤어진 마케팅이 독자의 눈을 더욱 흐려놓는다. 해답은 역시 정확한 도서 분류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책이 제대로 대접받는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