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0)내가 중국 참전으로 김일성등 지도부 친중 기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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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새 자동차를 가로채 찍힌 문일비서는 보신탕을 좋아하다 혼난 또다른 에피소드도 털어놨다.
문비서가 털어놓은「강아지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새 자동차 사건이 터진 그해 봄이었다.
김일성수상이 문비서에게 강아지한마리를 주면서『매우 영리한 종자이니 잘 기르라』며 신신당부하더라는 것이다.
수상은 집에 소련· 헝가리· 동독등 각국에서 들여온 명견 10여마리를 기르는 애견가였다.
수상이 준 강아지가 포동포동해진 늦여름 문일비서는 수상의 당부를 새져듣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그 강아지를 잡아먹었다.
얼마후 수상이 느닷없이 문왈비서집을 방문했다.
수상은 대문을 들어서면서 『부른을 지나다 강아지가 보고 싶어 들렀다』며『강아지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수상의 표정을 보니 강아지를 잡아먹었다는 소문을 들은 눈치였다.
문비서는『지난 여름 친구들과 함께 잡아 먹었습니다』고 이실직고했다.
안색이 변한 수상은 아무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비서는 민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치만 수상도 보신탕을 좋아하니ㅚ간이 지나면 웃고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강아지사건」의 후유증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이 사건이후 수상은 문비서에게 사사건건 신경질적으로 대했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의도적으로 따돌리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자동차사전까지 터졌으니 수상에게 신임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두 사건이 있은 후부터 문비서는 당· 정 간부들에게도 말발이 먹히지 않아 스스로 수상비서로서의 한계를 느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이두 사건이 불신임으로까지 비화한 북경에는 고도의 정치적인 문제가 깔려있었다고 주장했다.
즉 공화국과 소련· 중국간에 얽힌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수상의「차원 높은 정치력」 에 말려 희생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일면 설득력을 갖고 있다.
패전 직전 중국인민군의 지원으로 위기를 모면한 당시의 공화국지도부는 친 중국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있었다.
나는 공화국 수립후 김일성수상이 사석에서 술김에『만주에서 일본군에 쫓겨 국경을 넘어 하바로프스크부근에 도착, 붉은군대 정보기관원들에게 심한 고문등을 받았다』며『그러나 중국땅에서 항일운동을 할 때 중국동지들에게 받은 도움은 잊을 수 없다』 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소련에 대한 응어리와 친중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화국에 대해 입김이 세진 중국지도부는 공화국의 정치· 군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친소련과 인사들을 견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정확한 물증은 없지만 당시 여러가지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문비서는 모스크바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인사였다.
솔직치 말하면 소련정부의 명령으로, 평양에 파견된 소련파 간부들도 모두 모스크바 정보팀의 활용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최고권력자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문비서의 활용은 가위 절대적이었다.
중국지도부가 이를 모를리가 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문일을「소련정보기관의 대리인」 으로 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곱게 봤을리가 없다. 문비서도 중국측의 촉각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감지했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공화국 수립 전부터 수상과 함께 정적처리문제를 깊숙이 논의했던 터여서 수상이 전쟁실패에 따른 모종의 숙청계획을 서두르고 있음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 숙청대상은 두 말 할 것도 없이「숙명의 정적」박헌영 이었다. 문일은 이 사실 역시 중국측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측은 박헌영도 전서울 주재 소련부영사 샤브신등 소련정보기관의 후원을 받고 있는「소련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모르는척 지켜보고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문일은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소련으로 귀국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그의 귀국은 「자의방 타의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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