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튼스쿨 꿈 키우는 일본, 먼저 시도한 한국은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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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서울 강남의 사립고교인 중동고교엔 5천1백99만4천원이 입금됐다. 입금자는 서울시교육청. 학교 행정실은 여기에다 돈을 합해 교사.교직원에게 봉급을 줬다. 이 돈은 명목상 인건보조비다. 평준화 체제에 편입된 대가로 교육 당국이 쥐여준 것이다. '평준화 유지비'가 정확한 말일지도 모른다.

10년 전인 1994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시 삼성그룹은 분규 중이던 중동학원을 인수했다.

"한국의 이튼 스쿨을 만들어 달라."

이건희(李健熙) 삼성 회장의 주문이었다. 李회장은 인수 당시 윈스턴 처칠 총리 등 내로라 하는 영국의 지도자를 키운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 스쿨을 모델로 삼았다고 학교 관계자들은 회고했다.

그래서 중동고는 삼성에 인수된 직후부터 일체의 국가보조금을 받지 않았다. 당국의 규제를 받지 않으려면 보조금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획기적인 학생 중심의 교육, 교사 인사체계 개선 등을 통해 자율적으로 학교를 운영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천재 한명이 수만명을 먹여살린다"는 李회장의 '천재 경영론'이 평준화 의식이 팽배한 중등교육에서 통했을까. 결국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 학교 정창현(鄭昌鉉)교장은 "재단이나 학교 모두 지쳤다"고 말했다. 끝까지 보조금을 받지 않고 자립형 사립고로 나아가려 했지만 '평준화를 깬다'는 교육 당국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이제 선생님들은 '왜 피곤하게 하느냐'는 불만과 '보직은 돌아가면서 하자'는 나눠먹기 의식만 가득 찼다"고 한탄했다. 한국식 이튼 스쿨의 꿈이 처참하게 깨진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기업들이 나서 이 꿈을 지피고 있다.

도요타자동차.주부(中部)전력. 도카이(東海)여객철도 등 3개사가 영국의 이튼 학교를 모델로 중.고교 기숙학교식의 '새로운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개교는 2006년 4월이다. 일본의 미래를 책임질 창의적인 리더를 키운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강사진으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 등 해외 저명인사들이 거론될 정도다.

이들 기업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독특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키우고 싶다."

도요다 쇼이치로(豊田章一郞) 명예회장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가사이 요시유키(葛西敬之) 도카이여객철도 사장도 "학력저하, 사회성 상실, 창조성 약화 등 중심을 잃어버린 일본 교육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교육이 처한 환경과 문제의식은 비슷하다.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를 키워야 한다는 절박감은 오히려 우리가 일본보다 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도가 꺾였다. 재시도할 기약마저 없는 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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