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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수위이른 인술의식(사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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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의료」란 엄격히 말해 환자인 의료소비자와 의사라는 의료공급자 사이의 동등한 계약관계에 의해 성립되는 일종의 사회서비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선 의료는 의사가 환자에게 하향적으로 베푸는 시혜라는 통념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연세의료원이 선포한 「환자의 권리장전」은 이러한 왜곡된 통념과 관행을 시정하려는 움직임의 작은 시작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이 의료소비자측이 아닌 공급자측의 자기반성에서 출발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 환자의 권리장전이 담고 있는 열가지의 내용을 보면 환자가 일방적으로 받는 의료에서 환자도 참여하는 의료,환자가 납득하고 선택하며 의사 위주가 아니라 환자가 중심이 되는 의료의 실시를 규정하고 있다. 우리의 의료현실은 병원엘 한번쯤 다녀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러한 선언이 한낱 선언에 그치지 말고 의료현상에서 행동으로 옮겨져야할 필요을 절감할 것이다.
「3시간 기다렸다가 3분 진찰」이라는 종합병원의 진료실정은 의사에 비해 환자가 너무나 많으니 불가피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치료나 입원진료환자에 대한 간호사나 의사들의 불친절과 기계적인 행동은 환자가 마치 공장에서 이리 저리 옮겨지는 상품처럼 취급되는 듯한 불쾌함을 느끼게 한다.
각종 검사나 마취와 같은 시술의 전단계에서 세심한 주의를 안기울여 불의의 사고가 나기도 하고 중환자에 대한 사후조치가 구조적으로 미흡해 보호자들이 가슴을 죄기도 한다 또 무엇보다도 환자의 상태와 치료에 대한 정보차단이 큰 문제다. 가족들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그토록 무뚝뚝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환자의 치료를 위해선 병원과 가족의 긴밀한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치료내용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반드시 알려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병원들은 너무 권위적이고 환자에 군림하는 자세다.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환자권리법이나 환자권리장전 같은 제도는 지난 70년대 미국을 비롯해 일본·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소비자운동이나 민권운동,또는 피해자의 잦은 손해배상소송에 의해 이미 오래 전에 정착돼 있다. 때늦은 감이 있으나 우리 의료계가 일각에서나마 이러한 각성과 자정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다행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전의료계의 적극적인 동참에 의해 제도적인 장치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선언이란 문자 그대로 일회성 전시용에 그치고 말잔치로 끝나기 쉽다. 이것을 제도화 함으로써 의사와 환자와의 계약관계의식을 확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사가 시혜자라는 우월의식을 버리고 환자는 약자의 입장이라는 한가지 이유로 타혜자라는 패배의식을 버릴때 비로소 의료의 대등한 계약관계가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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