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줄이고 흐름에 맡겨야(김영삼정부의 과제:8·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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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문화­예술정책 방향/“정권안보용 장식품” 취급부당/뒷걸음 영화 등 경쟁력 높일때/대중문화 정비 건전하게 유도/다가온 뉴미디어 시대 대응을
김영삼정부는 최초의 문민정부임을 표방하고 있다. 사실 새정부가 기존의 어느 정부에 비해서도 그 정통성이 앞서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문민정부」의 의미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문민정부가 단순히 「군사정부」의 반의어 정도로 해석된다면 많은 국민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새 정부의 문화정책 방향은 우선 관주도에서 민간주도로의 전환,그리고 규제 위주에서 지원 위주로의 전환이 그 근본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의 문화정책은 철저히 정치 의존적 속성을 드러내 왔다. 문화를 정권안보를 위해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장식품」정도로 생각했던 전시대의 정책입안자들은 정치적·사회적 문화활동에는 규제를 가하면서 비정치적이거나 친여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아끼지 않는 기묘한 이중구조를 유지해왔다.
문화에 대한 정부지원은 언제나 행정기구의 확대를 수반했고 이는 곧 문화에 대한 정부간섭의 확대로 나타났다. 문화부문이 정치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은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과제는 아니지만 민주적 문화의 수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된다.
김영삼정부의 또 하나 과제는 급변하는 문화환경에 대한 정책대안 제시다.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힘입어 문화가 국제화·산업화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다.
이 새로운 문화환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책의 방향이 검토돼야 한다.
첫째로 시급한 것은 문화산업의 장기적 육성이다. 미국 등 선진국의 문화산업 침투는 이미 영화·음반 등에서 그 위력을 선보였고 머지않아 다른 분야에까지 확산될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문화산업은 정부 보호아래 특혜를 누려왔다. 그런 속에서 눈앞의 이윤에만 급급해 장기적 전망아래 「문화상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등한시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 직배영화에 시장을 내준 영화의 예에서 보듯 경쟁력의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현재 문화산업에 대한 장기적 정책은 전무한 상태다.
두번째로는 테크놀러지가 가져온 매체 다양화라는 경향에 대응하는 정책제시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10년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하던 매체들이 쏟아지고 있고 이들이 앞으로 문화계의 주도권을 잡으리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CA TV나 위성방송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곧 선보일 예정이며 CD­I,CD­ROM 등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뉴미디어에 대해 현재로선 아무런 정책방향도 없거니와 법적 근거조차 없는 분야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셋째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정책기조에서도 차별을 둘 필요가 있다. 문화의 수요와 공급이란 측면에서 고급문화는 날로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 일반시민이 1년에 한번 관람하기도 힘든 공연을 위해 막대한 재원을 낭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행태가 될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중문화의 퇴폐화를 은연중 방치하거나 혹은 지원을 구실로 특정분야를 규제하는 등의 낡은 관행으로는 대중문화는 여전히 「하수구문화」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건전한 대중문화 수립을 위한 하부구조의 정비에 초점이 두어져야 할 것이다.
서울대 강현두교수(신문학)도 『우리의 문화정책이 21세기 미디어사회에 대한 아무런 대안을 갖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주체적인 문화산업 육성은 단순히 문화영역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도 초미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화 영역은 그 자율적 속성상 「하면된다」는 식의 우격다짐이 통하지 않는 세계다. 더구나 문화수준의 최종 척도가 될 소프트웨어의 질은 결코 정책가나 행정가의 손에 의해 성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정부가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1회성 문화행사로 문화발전에 기여했다고 믿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결국 문화정책의 몫은 문화 종사자들이 창작활동에 몰두하여 양질의 소프트웨어를 공급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해주는 것 이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임재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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